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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호두과자 유명한 이유 호두과자는 일본에서 서양식 제과기술을 배워온 한국인 조귀근씨가 1934년 개발하여 천안 학화제과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호두 나무 유래 천안에 원래 호두나무가 많았다. 천안 광덕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는데 그곳에 수령 600년 이상된 호두나무가 있다. 고려의 외교관 류청신이 원나라에 가서 호두나무 하나를 가져와 천안 광덕사에 심은 것이 천안 호두나무의 시작이다.   천안 호두과자가 유명한 이유전국 고속도로 휴게소에 반드시 파는 호두과자는 지역의 이름을 음식에 붙여서 전국화된 첫번째 사례였다. 경부선과 호남선, 전라선 등 모든 일반 철도는 천안역을 지난다. 많은 기차가 거쳐 가는 만큼 정체도 심했는데 이를 눈여겨 본 천안역의 호두과자 집 하나가 아이들과 함께 기차역에서 호두과자를 팔기 시작했다. 기차 사.. 더보기
제주 해녀 이야기 : 해녀가 여자만 있는 이유. 바다의 어멍 (어머니) 해녀 해녀 문화는 우리나라와 일본, 이 두 나라에서만 있는 문화로 장비 없이 인간의 힘으로만 작업하는 문화를 말한다. 해녀들의 작업 방식을 나잠어업이라고 하는데 해녀들이 특별한 기계장치 없이 수심 10m 이상 바다밭에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어업을 말한다. 현재 오직 허가받은 해녀들만 나잠어업을 할수 있다. 바다밭은 법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해녀증이 있는 해녀도 본인이 속한 어촌계의 어장에서만 물질을 할수 있다.   해녀 규율, 계급바다에서 매일 목숨을 걸고 일하는 해녀들이기에  해녀도 체계가 있어서 규율에 따라 바닷가 해변으로 앉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 강력한 규율로 연대하여 서로를 보호하고 했던 것이다. 리더 대상군의 지휘아래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해녀 공동체이다.  물질.. 더보기
서귀포 지명 유래 : 서복 사기 사건.. 서귀포 지명 유래 서귀포라는 지명의 유래 정방폭포와 관련이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은 불로불사를 염원했다. 그때 서복이라는 자가 자신이 불로초를 찾아오겠다고 말한다. 서복은 3000명의 어린 남녀 동남동녀를 얻어 배를 타고 바다로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제주도의 정방폭포였다. 불로초를 찾으러 가다가 정방폭포에 들렀던 서복 일행은 '서복이 왔다 간다' 라는 글귀 서불과지 를 정방폭포 근처에 새기고 간다. 그래서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자리라는 뜻에서 서귀포라는 지명이 유래된 설이 있다. 그렇다면 서불과지라는 글씨가 정말 정방폭포에 새겨져 있는가? ▼ (벌거벗은 세계사)서복 사기 사건 : 서불과차 내용 확인해보기 진시황 불로초를 찾아 제주도로.. 불로불사 꿈꾸다. 기원전 221년 마침.. 더보기
추사 김정희 세한도 읽기 : 추사체란 ?/ 제주 추사관 건축 의미. 추사 김정희는 누구? 추사 김정희는 돌, 청동기 비단 따위에 남겨진 기록들을 연구하는 금석학의 대가였다. 다른 사람이 비석인 줄 알았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평양에 있는 고구려 비석도 많이 정체를 밝혀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문인이자 서예를 하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왕의 심기를 불쾌하게 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능지처참을 당한 윤상도의 옥사사건의 초안 상소를 김정희가 작성했다고 관련자들이 말을 해서 김정희가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와서 위리안치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집에서 나갈수 없는 최고등급유배) 된다. 그러나 제주도에 유배하던 기간에 많은 글을 쓰고 추사체를 제주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추사체는 어떤 서체인가? 추사 선생의 글씨가 추사체이다.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추사 선생의 글씨가 만년까지 여.. 더보기
파블로 피카소 이야기 (그의 작품은 어디서 영향을 받았나? ) 피카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이자 천재 예술가 , 20세기 미술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화가이다. 피카소의 작품은 천억 원이 넘는 작품이 많은 걸로도 유명하다.  피카소는 회화, 판화, 조각, 도자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약 15만 점의 작품을 남겼다.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피카소는 예술가 중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중에 천재성을 인정받은 인물로 풍족한 삶을 누렸던 화가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프랑스 사람은 아니지만 성인이 돼서 쭉 프랑스에서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프랑스 피카소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   피카소 풀네임원래 스페인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성을 함께 쓰는 관습이 있어 이름들이 다 길지만 피카소는 부모님 뿐만 아니라 조상의.. 더보기
도끼만행사건 요약 정리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도끼 만행 사건은 8월 18일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노무자들의 작업을 경비하던 유엔군 경비병들을 북한 군인 약 30여명이 계획적으로 기습해 와서 도끼와 곡괭이를 마구 휘둘러 미군 장교 두 명을 살해하고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측 경비병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유엔 관측 차량 3 대가 부서졌다. 이 사건으로 유엔군 소속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했다. 유엔군 3초소 앞에는 큰 미류나무가 있어서 유엔군 5초소가 커퍼를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시야 확보가 필요했고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결정한다. 당시에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 표시가 없었기 때문에 남북 왕래가 자유로웠던 JSA지역이었고 사소한 다툼이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이날 북한군이 가지치기를 하지말라며 시비.. 더보기
독도 일본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이유 , 근거 북한의 역사왜곡은 가히 어매이징할 정도이다. 그런 북한도 한 가지는 인정한 역사적 사실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이다.  2023년 검정을 통과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 11종에 독도는 자신의 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주장 1일본은 17세기 중반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것일본이 거듭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옛날 독도가 주인없는 땅일때  일본의 어부들이 70년 동안 어업활동을 했고 일본인 시마네현 고시를 먼저했다는 것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때부터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고 인정을 했다. 17세기 말 울릉도 독도에서 어업을 하던 부산 출신 어민 안용복은 돗토리번에 가서 일본 영주에게 독도는 조선 땅임을 주장하고 당시 에도 막부 역시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인정한 사건이 있다.   안용복.. 더보기
이중섭 화가 작품읽기, 해석: 아이 그림이 많은 이유, 러브스토리 MoMa 에 전시된 이중섭 그림 3개는? 이중섭은 국내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매료시킨 화가로 20세기 한국 화가 중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작품 3점이 전시되어 있는 화가이다. 미국 공보원장 아더 맥타가트가 이중섭 화가의 팬으로 개인 경매에서 구입후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을 하면서 이중섭 화가의 작품이 등록되게 된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에서도 1488점 중 104점이 이중섭 작품일 만큼 이건희 회장도 자랑했던 화가이다. 이중섭 화가가 제주도도 온 이유 1952년 6.25 전쟁 중 제주도로 피난 온 이중섭은 1년여정도의 제주도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 것이라 추측한다. 제주도 자구리 공원에는 이중섭 화가와 아내가 함께 매일 산책했던 산책로를 만들어 놨다. .. 더보기
이중섭 흰소 , 황소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 이중섭 소를 많이 그린 이유 이중섭 화가는 오산 고등보틍학교를 들어가 임용련 미술 선생님을 만났고 이것이 그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가장 조선인 다운모습으로 조선인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중섭이 선택한 그림이 바로 소였다. 이중섭 화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조선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소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소의 이미지가 긍지를 잃지 않고 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조선인의 의지를 담아낸 것이 소 그림이다. 1940년대 이중섭 작품 1940년 대 이중섭 작품은 대부분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불타버렸다. 사람들은 이중섭 화가는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작품에 잘 담아서 그린 화가 중 한명이라고 말한다. 1953년에 그린 황소와 1956년 .. 더보기
제주 4.3 사건 :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이유.. (순이 삼촌 )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민간인 1만 4천여 명을 희생시킨 비극적인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또는 일제에서 막 해방된 미군정 상태의 한국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꿈꿨던 남조선 노동당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램과 달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가 예고된다. 제주도 안 남로당 조직은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고자 했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의 남로당 350여 명은 제주 경찰서 지서들을 무장공격한다.  그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 학살과 탄압이 시작된다. 정부토벌군 강력한 반격,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쓴다.  무장 봉기대와 경찰 경비대 , 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