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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문화예술

이중섭 화가 작품읽기, 해석: 아이 그림이 많은 이유, 러브스토리

MoMa 에 전시된 이중섭 그림 3개는? 

이중섭은 국내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매료시킨 화가로 20세기 한국 화가 중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작품 3점이 전시되어 있는 화가이다. 미국 공보원장 아더 맥타가트가 이중섭 화가의 팬으로 개인 경매에서 구입후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을 하면서 이중섭 화가의 작품이 등록되게 된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에서도 1488점 중 104점이 이중섭 작품일 만큼 이건희 회장도 자랑했던 화가이다. 

 

 

은지화로 그린 그림으로 이중섭 작품속 중요 주제 중 하나가 아이들이다.

 

이중섭 화가가 제주도도 온 이유

1952년 6.25 전쟁 중 제주도로 피난 온 이중섭은 1년여정도의 제주도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 것이라 추측한다. 제주도 자구리 공원에는 이중섭 화가와 아내가 함께 매일 산책했던 산책로를 만들어 놨다. 또한 이곳의 풍경을 그린 그림도 있다. 

 

제주도 자구리 공원은 이중섭 화가가 아내와 실제로 산책을 했던 장소
이중섭 공원

 

이중섭의 제주 생활을 볼수 있는 작품들 

이중섭 미술관은 2002년 서귀포시에서 이중섭 거주지를 복원하면서 탄생한 미술관이다. 처음 오픈할때 넉넉지 않았던 예산으로 원화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문화인들의 기증과 다양한 노력으로 인해 최근에는 이건희 컬렉션에서 12점의 작품을 기증 받아 이제는 이중섭의 풍부한 작품들 관람이 가능하게 되었다.  <섶섬이 있는 풍경> 도 이곳에서 만날수 있다. 

 

섶섬이 있는 풍경
사실 이 그림은 나무껍질 판넬에 그린 그림이다. 원화를 봐야 느낄수 있는 질감이다. 
<서귀포의 환상>

당시 제주도에선 그림재료 구하기가 하늘 별따기여서 주변의 나무판자를 캔버스 삼아 그렸던 그림이다. 나무판자에 그린 또 다른 그림 <서귀포의 환상 > 과 더불어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 장판지에 그린 <옛 이야기> 등 다양한 재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중섭 그림에 바닷게가 많은 이유 

이 작품은 이중섭에게 가족이란 작은 단칸방 속 가족끼리 부대기며 지냈던 것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살을 부딛끼며 연결이 되어 있어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이 그림은 가족을 합친 모습의 그림이다. 또한 이중섭 작품에서 아이만큼 많이 나오는 것이 '게' 이다. 심지어 미술관 모양도 게 모양이다.    

 

<파란 게와 어린이>

 

이중섭 화가는 항상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긴 것이 아니라 해안가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고 주로 바닷게를 잡아 삶아 먹었던 이중섭 가족이었다.  그때 바닷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서 바닷게들한테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중섭 마사코의 일화를 담은 작품들

이중섭 화가는 평원군 출신의 이북 화가이다. 이중섭의 집안은 정말 대단해서 아버지 이희주는 거의 천석꾼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천석군은 지금의 연 수입 약 200억원 정도라는 의미로 그런 갑부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중섭은 오산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중섭은 거기서도 이미 유명인사였다. 일본에서 알려진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4년동안 이미 12번이나 입선을 한 천재 유명화가였다. 그러나 이중섭의 평생 연인은 일본인이자 아 마사코 한 사람뿐이었다. 이중섭은 이미 학교에서 최고의 인기남이었다. 그러나 서로 수줍음이 많이 주변에서 이 둘을 이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마사코의 집안은 천주교 집안으로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엽서는 마사코와의 일화가 담겨있다.  이중섭과의 데이트 중 마사코의 구두굽이 부러져 발을 다쳤는데 이중섭이 직접 치료를 해줬다고 한다. 치료하면서 마사코의 발가락이 이쁘기도하고 길기도 해서 이중섭은 여자친구의 애칭을 발가락 군, 아스파라가스 군이라고 붙여주기도 했다. 

 

 

 

남아있는 이중섭의 1940년대 그림은 전쟁으로 인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뿐이다. 피난 및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이중섭 화가가 이 시절에 여자친구에게 엽서를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중섭 화가가 1940년에 어떤작품을  그렸는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중섭 화가의 엽서화는 1940년대 화풍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때 이중섭 화가는 고향인 원산, 조선으로 갔다. 일본에서 징병을 가는니 고향으로 가자고 생각해서 마사코와 이별을 맞게 된다. 처음 헤어지고 1년 정도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쟁 말기에 다다르며 조선과 일본을 가는 연락선도 침몰하게 되니 연락을 주고 받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이중섭의 가족은 일본인 마사코를 반대했고 이로 인해 마사코를 결혼하기 위해 부르게 된다. 마사코는 미국의 공습이 한창이던 때 조선으로 향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중섭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이에 이중섭의 어머니도 결혼을 허락하게 되고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이중섭 아이들 그림 많은 이유 

이중섭의 첫 번째 아이는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이중섭은 자신의 아들이 너무 일찍죽어 친구가 없어서 아이의 친구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관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이중섭의 군동화: 어린아이가 모여 있는 그림이란 뜻으로 이중섭의 시그니처 주체중 하나가 이때부터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동화 속 아이들의 특징을 보면 언제나 발가벗은 사내아이들이다. 생전에 죽은 첫째 아들의 모습이 옷도 제대로 입혀보기 전에 떠난 첫 아기의 기억을 그린 것이다. 아래쪽 복숭아 그림의 의미는 무병장수의 의미로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을 빌었을 이중섭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곧 남북이 군열되고 이중섭의 고향은 이북이었고 1946년 북한은 토지개혁을 통해  자본 계급 북한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한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집안이 기울어진다. 그리고 얼마 후 6.25 전쟁이 벌어지면서 부산으로 내려와 피난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산이 10만명의 피난민으로 포화상태가 되면서 제주도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정된  제주도 서귀포로 내려가야 했다. 

 

 

그때는 한겨울이었고 2,3살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제주도로 내려와야 했다. 춥고 험한 한라산 내륙을 피해 해안가로 돌아오다 보니 주민들에게 고구마, 감자등을 얻어먹으며 너무 추우면 외양간에서 잠을 자며 꼬박 3일이 걸려 내려갔다. 그때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 <피난민과 첫눈> 이다. 

 

 

이중섭 화백이 가장 그리기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초상화였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이 이중섭 화가에게 초상화를 요청했고 거절할수 없었던 가족 잃은 주민을 위해 몇점 안되는 초상화를 그려주게 된다. 가족을 보낸 슬픔을 누구보다 잘알았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은 좋았으나 너무 가난하고 잘 먹지 못해 아내는 결핵에 걸리고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이중섭 화가는 1년 남짓한 제주도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있다 일본에서 장인어른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마사코는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전쟁도 아직 안끝나고 아이들의 건강도 나빠지고 있어서 전쟁이 끝날때 까지만이라고 처가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중섭 화가의 국적은 한국이라 전쟁중에 일본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과 원치않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부터 수 많은 편지를 쓰게 된다. 

 

이중섭 가족들이 제주도에서 살았던 집은 부엌이 딸린 1.4 단 한칸 뿐 
이중섭 가족의 거주지
이 좁은 방에서 여름에 가족들은 더위를 이기기 위해 옷을 벗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에 가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이중섭은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통영에서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거의 하루에 한점씩 그리기 시작한다. 이때 소 시리즈를 비롯해 이중섭의 대표작 대부분이 이 시기에 탄생한다. 그리고 이중섭 화백이 연 <통영 전시회>가 성공한다. 이때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 이중섭의 그림을 가지고 갈 정도로 성공한다. 이 성공을 발판삼아 서울 미도파 화랑 개인전 전시회를 준비한다. 그러나 벌거벗은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그림들이라 춘화(외설)라는 오명을 받게 되고 그림 구입이 후불제였다. 이중섭 화백이 제일 못했던 말이 돈을 받으려 다니는 일이었다. 그림값 흥정에 제값 못 받기가 일쑤였고 심지어는 액자값도 제대로 지불을 못했다. 대관료를 지불하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큰 충격을 받고 가족 상봉은 물거품이 된다. 

 

<시인 구상의 가족 >

이때 그림 작품이 <시인 구상의 가족 > 구상 시인이 큰 아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고 있는 장면이다. 행복 그 자체이지면 우측은 이중섭 자신으로 평상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쓸쓸하고 외로워보인다.  이 전시회를 성공하면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줄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 이중섭은 이후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이끼던 그림까지 불태우며 그의 삶이 점점 피폐해지자 친구들은 그를 돌보기 위해 주변 친구의 도움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거식증까지 걸리고 술만 마시게 되니 황달 증상까지 찾아온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자신은 다시 가족들을 못 만날것이라는 절망이 담긴 작품 같기도 ..

힘들어도 아내에게 3일에 한번씩 편지를 보냈던 이중섭 화백이었으나 간염으로 입원치료를 받던 중 1956년 9월 6일 사망에 이른다. 이날은 하필이면 태풍 엠마가 하루종일 비,바람이 몰이치던 날이여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병원에서는 연락할 곳이 없어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화장 처리되었다 .

 

아내 남덕에게 전해진 이중섭의 사망 전보

이후 아내 남덕에게 이중섭 유골 일부가 전달되었다. 그리고 2022년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남덕)는 평생 남편 이중섭을 그리워하며 떠났다. 

 

 

이중섭 흰소 , 황소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

이중섭 소를 많이 그린 이유 이중섭 화가는 오산 고등보틍학교를 들어가 임용련 미술 선생님을 만났고 이것이 그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가장 조선인 다운모습으로 조선인의 모습을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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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가 그림 위작 논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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