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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후손 존재할까? 황사손 이원이 잇는 마지막 황실 명맥 한때 왕이 다스렸던 나라, 조선. 그리고 그 왕권을 이어받은 대한제국. 하지만 1945년 해방과 함께 황실은 해체되었고, 이제는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국 시대다. 그렇다면 지금도 왕족이 존재할까? 혹은 황실 후손은 어디에 있을까?✔️ 법적으로 왕족은 없다대한민국은 1948년 헌법에 따라 왕정이 아닌 공화국 체제로 전환되었다.이에 따라 1945년 광복 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해체되었고,국가 차원에서 ‘왕족’이나 ‘황실’이라는 신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즉,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법적으로 인정되는 왕족이나 황실 후계자는 없다. 그러나 혈통은 살아 있다공식적인 왕실 제도는 사라졌지만,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다만 그들은 정치적 권력도, 법적 특권도 없이 평범한 시민으로.. 더보기
조선 왕실 여성들의 삶 화려한 한복, 고요한 궁궐, 수려한 자태. 조선 왕실 여인들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온갖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한 위계, 예법, 정치, 고립이라는 구조 안에서 감정조차 절제하며 살아야 했던 제도화된 삶이 있었다.오늘은 조선시대 왕실 여성들의 삶을, 그 지위별로 살펴본다. 👑 1. 왕비 – 국모의 무게, 질서의 중심임무: 세자 생산, 내명부 통솔, 국가의례 주관 등위치: 교태전, 대조전 등 중궁의 핵심 공간에 거주고충: 후궁과의 갈등, 자녀 문제, 대비·대왕대비에 대한 봉양 등🟨 실제 사례인현왕후: 희빈 장씨와의 갈등 끝에 폐위되었으나 복위됨.문정왕후: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통해 정권을 장악. 👵 2. 왕대비·대왕대비 – 국정을 움직.. 더보기
노비 출신 건축가, 박자청 이야기 박자청(朴子靑, 1357~1423)은 조선 초기, 정통 궁궐 건축의 기틀을 세운 도편수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동래 출신의 관노(官奴), 즉 국가 소속 노비였다. 원래는 고위 관료였던 황희석 집안의 문도(門奴), 즉 문간 노비로 일하던 인물이었다.그는 어려서부터 목수 일에 소질을 보였고, 특히 도면 설계와 목재 가공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재주를 알아본 황희석은 그를 궁궐 공사에 추천하였다. 이후 박자청은 왕실 건축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의 명에 따라 창덕궁, 문묘, 왕릉 건축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도편수(都片手), 즉 궁궐 건축과 수리를 총괄하는 최고 장인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그는 **경회루 중건(1412년.. 더보기
창덕궁 선정전 : 청기와의 비밀 📘 선정전 건립과 재건 연도1405년(태종 5): 창덕궁 건립과 함께 선정전도 처음 세워졌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로 창덕궁 전각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1610년(광해군 2년): 창덕궁이 재건되었고, 선정전도 함께 복원되었다.1623년(인조반정): 반정 과정 중 궁궐 일부가 다시 불에 타면서 선정전도 피해를 입었다.1647년(인조 25년): 인조는 인왕산 아래 인경궁에 광해군이 지었던 편전 ‘광정전’의 자재를 옮겨 선정전을 다시 지었고, 이때 청기와를 얹히며 오늘날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선정전에 청기와를 얹은 이유 조선의 5대 궁궐 중 창덕궁 선정전은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이 청기와는 본래 광해군이 지은 별궁 인경궁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 더보기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진짜 여행기인가 과장된 모험인가? 13세기, 유럽 사람들은 중국이 어떤 곳인지 거의 몰랐다. 그런데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한 청년이 중국까지 여행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게 과연 사실일까?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 비행기도, 기차도 없던 시절에 유럽에서 아시아 끝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정말 놀랍다. 과연 『동방견문록』은 진짜 여행 기록일까, 아니면 흥미를 끌기 위한 이야기였을까?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유럽인이 처음으로 아시아 세계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그 속에는 13세기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풍경과 문화, 경제에 대한 놀라운 묘사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진실일까? 혹시 과장이 섞인 여행담은 아닐까?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Il Milione)』은 단순한 여행기가 .. 더보기
고종은 왜 대한제국을 선포했을까? 생존을 건 황제 선언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 황제가 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 날은 1897년 10월 12일이었다. 이 날은 단순한 국가 이름 변경이 아닌, 조선 500년 체제를 스스로 뒤엎고 황제국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을 쓰며 황제가 되었을까? 단지 허세였을까, 아니면 절박한 생존전략이었을까? 튀르키예 뜻 국가이름 바꾼 이유" data-og-description="2022년 터키는 국가명을 turkey'에서 'Türkiye' 튀르키예로 바꿨다. 국명을 변경한 것에는 국가브랜드 이미지 향상의 일환이지만 정치적 의도도 있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자국의 영" data-og-host="jangane.tistory.com" data-og-source.. 더보기
덕수궁 함녕전 : 망국의 황제 고종이 남긴 것은? 고종이 승하한 함녕전 1897년 창건된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에 지어진 고종의 침전이다. 1904년에 온돌 수리 공사 중 일어난 대화재로 함녕전을 포함 덕수궁 내 전각들이 소실됐다가 같은 해 12월에 복원됐다. 이 화재로 인해 덕수궁의 거의 모든 건물이 다 불타없어졌다. 이후 고종황제는 수옥헌이라는 지금의 중명전이라는 곳으로 옮겨서 업무를 보게 되었다.함녕전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명성황후의 사진과 옥새였다. 명성황후 시해 후 덕수궁에 전화가 설치되고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음성을 들을 수 있단 사실에 놀았던 고종은 명성황후가 잠든 홍릉에 전화를 설치한 후 전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안부를 물어보았고 거기 교환수가 무덤 쪽에 수화기를 대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통.. 더보기
월산대군은 왜 왕이 되지 못했을까? 성종이 왕이 된 결정적 이유 👉 조선 왕실에서 왕위 계승은 단순한 혈통 순서로만 결정되지 않았다.정치적 역학관계, 건강, 신하들의 계산, 외척의 힘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세조의 장손이자 적통 후계자인 월산대군이 아닌, 동생 성종이 왕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은 누구인가?본명: 이정(李婷)자(字): 자미(子美)호(號): 풍월정(風月亭)시호: 효문(孝文)생몰연도: 1454년 ~ 1489년월산대군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수양대군)**의 손자이자, 추존왕 **덕종(의경세자)**의 장남이다.어머니는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로, 왕실에서도 정통성을 가진 **장손(eldest grandson)**이었다.그의 동생이 바로 조선 제9대 왕 **성종(이혈)**이다.왕위 계승 원칙상 장손이 우선이었고, 예종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