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 황제가 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 날은 1897년 10월 12일이었다. 이 날은 단순한 국가 이름 변경이 아닌, 조선 500년 체제를 스스로 뒤엎고 황제국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을 쓰며 황제가 되었을까? 단지 허세였을까, 아니면 절박한 생존전략이었을까?
터키 -> 튀르키예 뜻 국가이름 바꾼 이유
2022년 터키는 국가명을 turkey'에서 'Türkiye' 튀르키예로 바꿨다. 국명을 변경한 것에는 국가브랜드 이미지 향상의 일환이지만 정치적 의도도 있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자국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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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의 '황제 선언', 배경은?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명성황후를 경복궁에서 시해했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불린다. 이후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해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여기서 고종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 정세를 파악하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조선이 중국에 지배를 당했던 적이 있었나?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속국(屬國, tributary state)’ 취급을 받아왔다.
*속국이란 무엇일까? 확인해보자. 👇
조선이 중국에 지배당한적 있나? 조공 관계에서 현대 외교까지, 한반도 외교 600년의 전략
한반도는 예로부터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 딜레마(geopolitical dilemma)’를 안고 있다. 조선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약 500년 동안 존속한 국가였다. 그 기간 동안 명나라와 청나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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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淸日戰爭)*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馬關條約, Treaty of Shimonoseki)*에서 조선은 명목상 ‘독립국’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간섭은 더욱 노골적으로 심해졌다. 고종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할 필요가 있었다.
⭐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대한(大韓)’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삼한(三韓)’에서 유래했다. 고종은 ‘조선’이란 이름 대신 ‘대한’을 사용하며, 새로운 시작과 독립된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제국’이란 단어는 단순한 국가(nation)가 아니라,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empire)를 의미한다. 황제는 곧 자주권의 상징이었다.
즉, ‘대한제국’이란 이름은 단순히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과 자주권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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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 즉위와 독립문, 그 상징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환구단은 천제(天帝)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며, 이는 명백히 ‘천자(天子, Son of Heaven)’로서의 자격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었다.
또한 독립문 건립도 같은 맥락이었다. 독립문은 1897년 완공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 이는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자주국의 입구를 상징적으로 세운 것이었다.
독립문 건립 배경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독립문 건립 배경 1896년 세워진 독립문은 19세기 조공, 책봉 관계였던 조선과 청나라 시대인데 1636년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신하의 나라가 된다. 1882년 임오군란등을 거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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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의 전략, 효과는 있었나?
대한제국 선포는 국제사회에 강력한 독립의지를 알리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열강은 조선의 자주 선언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더 중요시했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와의 경쟁 끝에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에는 결국 강제 병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는 단순한 명분쌓기가 아니라, 근대 국제질서 속에서 자주국으로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 문화 이야기: 황제 즉위 후 바뀐 것들
황제가 되면서 조선의 국호와 상징물뿐 아니라, 연호도 ‘광무(光武)’로 바뀌었다. 궁궐의 건축도 서양식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전화기와 전차, 의복 등에도 서구 문물이 도입되었다. 특히 고종은 커피를 즐겨 마시던 황제로 알려져 있으며, 정동 지역에는 그의 커피 애호로 인해 ‘정동 커피문화’가 퍼졌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서양 제국과 마찬가지로 ‘근대화’를 통해 자주독립을 지키려 했던 고종의 노력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역사적 의미는 크다.
‼️고종이 남긴 것은 ?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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