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정전 건립과 재건 연도
- 1405년(태종 5): 창덕궁 건립과 함께 선정전도 처음 세워졌다.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로 창덕궁 전각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 1610년(광해군 2년): 창덕궁이 재건되었고, 선정전도 함께 복원되었다.
- 1623년(인조반정): 반정 과정 중 궁궐 일부가 다시 불에 타면서 선정전도 피해를 입었다.
- 1647년(인조 25년): 인조는 인왕산 아래 인경궁에 광해군이 지었던 편전 ‘광정전’의 자재를 옮겨 선정전을 다시 지었고, 이때 청기와가 얹히며 오늘날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선정전에 청기와를 얹은 이유
조선의 5대 궁궐 중 창덕궁 선정전은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이 청기와는 본래 광해군이 지은 별궁 인경궁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으로 정통성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란을 떠나면서 그를 세자로 책봉하고 전쟁을 수습하게 하였다. 선조의 적자인 임해군은 전쟁 중 포로가 되었고, 신성군은 나이가 어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광해군은 실질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즉위 이후에도 자신의 출신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불안을 극복하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사직단 인근, 현재의 배화여고 자리에 인경궁이라는 화려한 별궁을 건설하였다. 이곳의 편전인 광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 청기와는 일반 흑기와와 달리 유약을 입혀 구운 고급 자재로, 주원료인 염초는 당시 화약 제조에 사용되던 전략물자였다. 임진왜란 직후 자주국방이 시급했던 시기에 청기와는 매우 사치스러운 건축 자재로 여겨졌으나, 광해군은 이를 사용해 자신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인경궁은 폐허가 되었고, 인조는 이 궁을 해체해 창덕궁 선정전을 다시 짓는 데 자재를 재활용하였다. 1647년(인조 25년), 선정전 복구 작업에서 광정전의 청기와가 그대로 옮겨져 얹히게 되었고, 그 결과 창덕궁 선정전은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궁궐 건물로 남게 되었다. 이는 광해군의 정통성 불안과 인조의 정치적 재활용이 맞물려 만들어진 역사적 결과이다.
역사 속에서 두번의 반정이 일어나는데 중종반정, 인조반정 두번 모두 창덕궁에서 일어난다. 왕의 집무실 선정전에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인조반정)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쫓겨난 곳(중종반정)도 창덕궁 선정전이었다.
✔️선정전 기능
왕이 6품 이상 고위 신하와 매일 아침 조정회의, 경연, 국정 세미나를 진행하던 공식 집무실이다 . 원래 이름은 **‘조계청(朝啟廳)’**으로, 아침에 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 **1461년(세조 7년)**에 이름을 ‘선정전’으로 바꾸면서, ‘선정전(宣政殿)’은 ‘바른 정치를 널리 펼친다’는 뜻으로 왕의 공식 집무실이자 정치적 상징으로 격상되었습니다.
- 편전에서 6품 이상(지금 6급 이상 관리) 신하들과 매일 만남 - 매일 오전 5시에 옴.
또 다른 특징은 복도각이다. *복도각(回廊)**은, 빈전·혼전 의례 동안 비나 햇빛을 피하며 이동할 수 있도록 설치되었다. 인조 반정 이후 인조는 이곳을 평상시에는 편전으로 사용하다가 임금과 왕후의 승하후 빈전, 신주를 모시는 혼전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전각) 으로 사용했다. 선조(1800년 이후) 부터는 선정전이 작아 후기에는 혼전으로만 사용하고 집무실을 희정당으로 옮기게 된다.
집무실은 벽이 없고 문과 창문으로 되어 있다. 바닥은 난방이 안되는 마루바닥으로 되어 있다.
‼️ 사관 이야기 – 조선 왕조 실록의 비밀
조선 태종 시절, ‘민의생’이라는 사관이 있었다. 그는 임금의 모든 언행을 기록하기 위해 항상 따라다녔고, 심지어 임금이 피할 정도로 집요하였다. 어느 날 태종이 “사관은 못 들어오게 하라”고 하자, 민의생은 병풍 뒤에 숨어 있다가 임금의 말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또 한 번은 태종이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갔다가 비를 맞고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때 태종이 가장 먼저 한 말이 “사관놈 모르게 하라”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조차 그대로 실록 초안에 남아 있다. 이렇게 사관들이 매일같이 기록한 자료가 훗날 조선왕조실록의 기초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무려 47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된 왕과 조정의 공식 역사이다. 왕의 발언, 행적, 날씨까지 빠짐없이 적었고, 이 기록은 지금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인터넷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오늘날 비서실 업무와 유사한 '승정원일기'도 존재하며, 정조가 영조 때부터 쓴 ‘일성록’도 있다. 이런 기록들은 당시의 사건을 임금의 시각이 아닌 사관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남긴 자료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역사 기록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모두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기록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임금이 살아 있을 때는 절대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임금이 사망한 뒤에야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그런데 단 한 명, 이 기록을 몰래 본 임금이 있었으니 바로 연산군이었다. 그는 이 기록에서 신하들의 비판과 음해를 읽고 분노했으며, 그로 인해 사관을 처벌하고 기록을 억압하려 했다. 결국 그는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런 사례는 실록 기록의 엄격한 독립성과 사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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