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청(朴子靑, 1357~1423)은 조선 초기, 정통 궁궐 건축의 기틀을 세운 도편수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동래 출신의 관노(官奴), 즉 국가 소속 노비였다. 원래는 고위 관료였던 황희석 집안의 문도(門奴), 즉 문간 노비로 일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수 일에 소질을 보였고, 특히 도면 설계와 목재 가공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재주를 알아본 황희석은 그를 궁궐 공사에 추천하였다. 이후 박자청은 왕실 건축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의 명에 따라 창덕궁, 문묘, 왕릉 건축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도편수(都片手), 즉 궁궐 건축과 수리를 총괄하는 최고 장인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그는 **경회루 중건(1412년경)**과 **창덕궁 건축(1405년)**을 지휘하며, 당시로선 보기 드문 천인 출신 고관이 되었다. 그의 기술력은 한양 건설의 구상을 실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 초 궁궐 건축의 기준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후에 그는 공조판서까지 오르게 되며, 사실상 장인의 신분적 한계를 넘은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박자청의 삶은 조선 시대 신분제가 엄격했던 사회에서도 노비 출신도 실력과 성실로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시대 기술관료의 상징인 장영실과 함께, ‘천출입신(賤出立身)’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 박자청 연표 – 노비 출신 조선 최고 건축가의 인생 (1357~1423)
🔹 1357년 – 동래에서 관노로 출생
박자청은 동래 출신의 **관노(官奴)**로 태어났다. 그는 황희석 가문의 문도(門奴)로 일하며 어린 시절부터 목공 기술을 익혔다.
🔹 1392년 – 조선 건국 (35세)
조선 개국 전후로 목수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건국 이후 증가한 건축 수요에 따라 기술자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 1400년경 – 국왕 호군 임명 → 무반 전환 (약 43세)
군에 편입되어 **호군(護軍)**으로 국왕을 호위했고, 이후 무반 관직으로 전환되어 정식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 업적: 건축 기술 관리로 본격적 경력 시작
🔹 1405년 – 창덕궁 건설 (48세)
태종의 명으로 창덕궁을 건설하면서 박자청은 도편수로 발탁된다. 이 궁은 자연 지형을 살린 조화로운 궁궐로 오늘날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건축물:
- 창덕궁 (조선 제2의 정궁, 14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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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8년 – 태조 이성계 건원릉 건설 (51세)
태조의 장례 후, 박자청은 조선 왕릉의 최초 사례인 건원릉(建元陵) 건설을 주도하였다. 이는 이후 조선 왕릉 양식의 전범이 되었다.
🏛️ 건축물:
- 건원릉 (태조 이성계의 묘)
🔹 1412년 – 경회루 중건 (55세)
태종의 명으로 **경복궁 연못 위의 경회루(慶會樓)**를 중건하였다. 조선 수경건축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 건축물:
🔹 1410년대 후반~1420년대 – 왕릉·공공건축 총지휘
박자청은 조선 왕실과 국가 건축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왕릉, 다리, 궁궐 외곽 건축 등을 총괄하였다.
🏛️ 건축물:
- 헌릉 (태종 이방원의 묘)
- 살곶이다리 (중랑천 위 석교)
- 창경궁·문묘·성균관 일부 건물
📈 지위: 공조판서에 오르며 조선 기술직 최고 자리에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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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년 – 세종 즉위 (61세)
세종은 박자청을 단순 기술자 이상의 국가 원로로 존경하였고, 조정 내에서도 크게 신뢰하였다.
🔹 1423년 – 사망 (66세)
박자청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직접 제문을 작성하였다.
이는 조선 역사상 노비 출신 인물에게 내려진 최고 예우였다.
✅ 박자청의 대표 건축물 리스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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