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동의회 엄인섭 독립투사에서 밀정으로.. (15만원 탈취 의거 ) 엄인섭은 누구? 엄인섭은 동의회 소속 독립 운동가였다.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항일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였기 때문에 엄인섭의 실체를 최근까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의 기밀자료가 공개되면서 엄인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1911년 부터 엄인섭이 정보를 보고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15만원 탈취 의거 엄인섭이 밀정으로 드러난 결정적인 사건은 간도 15만 원 사건이 있다.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제가 1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을 운송 중이었고 이것을 탈취해 독립군 문기를 구입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탈취와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된다. 이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이 체포가 되서 서대.. 더보기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의회, 권업회 만들다.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이다. 최재형은 재력가이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나 사실 최재형은 아버지는 노비 어머니는 기생인 노비 출신이다. 1860년대 함경북도를 덮친 흉년때 가난과 학정을 피해 수많은 한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을 갔다. 1869년에만 약 6000명의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했고 이에 러시아 정부는 토지를 제공, 세금 면제 등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최재형이었다. \러시아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익힌 최재형은 이후 배를 타며 선원 생활을 했고 생활기반을 다졌다. 최재형은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생활을 하며 통역과 군수사업으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며 출세의 기반을 다졌다. .. 더보기 싱가포르 어떻게 독립국가가 되었나? (싱가포르 국기 의미/건국 아버지 리콴유 ) 161-3 [이전글] 건국 아버지 리콴유 1959년 영국은 싱가포르의 요구에 따라 자치 정부를 수립한다. 1959년 6월 싱가포르는 의원내각제 기반의 최초의 보통 선거를 실시했고 이 선거에서 훗날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초대 총리 리콴유가 당선된다. 리콴유는 화교 4세 출신으로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한 인민행동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식민시절에 모여들었던 다인종간의 화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싱가포르를 교역 중심에서 산업 사회로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공약한다. 이 공약으로 리콴유는 싱가포르 집권 여당 및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당선된 것이다. 말레이시아 연방 수립의 문제점 그러나 이후 바로 냉전시기로 접어들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자 당시.. 더보기 싱가포르 식민지 시기 역사 (영국 식민기->일본 식민지 ) 161-2 [이전글] 영국 식민기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영국은 싱가포르 개척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1822년 가장 먼저 한 일은 척박한 땅을 개간한 것이다. 강 남쪽의 습지와 늪지대를 평평하게 만들고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상업 지구로 개발한다. 또한 1868년 제일 중요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싱가포르 섬 한가운데 최초의 저수지 맥리치 저수지를 건설한다. 초기에는 작은 저주지였으나 현재는 약 6배 규모로 개발 자연공원으로 이용 중이다. 이 저수지는 싱가포르의 식수 공급과 선박들의 용수 공급처로 활용되었다. 또한 해적과 외부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이후 이곳은 영국 식민정부의 중요한 지휘 본부가 된다. 군사 기지가 완성 된 후 영국은 해적 소탕을 시작한다. 영국의 .. 더보기 싱가포르 역사 (어떻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나?)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의 나라이지만 2023년 1인당 GDP 88.450 달러로 아시아 1위, 세계 5위의 경제 부국으로 뽑히는 나라이다. 또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 5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싱가포르는 인구 약 600만 명의 작은 나라로 구글, 아마존, 애플 등 약 5천개 이상의 다국적 기업과 세계적인 금융사가 다수 진출해 있고 석유화학, 전자 등도 첨단 제품 수출을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불과 200여 년 전만 해도 해안가를 뒤덮은 두개골과 수천 마리 쥐가 들끓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죽음의 섬이었다. 땅의 대부분이 늪지대와 정글뿐이었고 마실 물조차 굉장히 부족했다. 싱가푸라 왕국1299년 싱가포르는 싱가푸.. 더보기 프랑스 혁명 1789년 민주주의 근간이 되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 프랑스 혁명은 세금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있으나 실제 프랑스 정부 예산에서 왕실 예산은 겨우 5%였다. 그래서 왕실의 사치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프랑스 세금의 70 퍼센트는 국방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은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때 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왕정의 부채가 1년 예산의 15배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방법으로 세금을 올렸던 것이다. 문제는 앙시앙 레짐 이라는 구체제 사회의 모순이었다. 당시 평민 계급은 프랑스 인구의 98%였고 귀족 성직자 2% 였는데 평민 중에도 돈이 많은 은행가나.. 더보기 북촌 한옥마을 어떻게 탄생했나? 정세권 그는 누구인가? 북촌과 남촌 북촌 한옥마을의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는다. 북촌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부터 쓴 명칭이다. 조선시대 북촌은 현재 가회동, 인사동을 포함 현재보다 더 넓었던 지역으로 왕족과 권세높은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근처에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북촌과 더불어 청계천 남쪽에 남산까지 아우르 지금의 명동, 을지로, 충무로 지역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북촌과 달리 남촌은 권세가 낮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북촌과 남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1880년대 후반부터 유입되어 남촌에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 사건 경술국치가 되고 한양의 이름을 경성으로 바꾼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의 세력이.. 더보기 고려와 몽골 관계 간략 역사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이유는 당시 금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던 거란족이 몽골군의 힘을 등에 업고 독립을 꽤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란이 결국 몽골을 다시 배신하게 되고 몽골의 자신의 신념인 배신자는 끝까지 응징한다는 원칙대로 거란족을 끝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거란족이 도망온 곳이 고려였다. 서로 다른 외교 방식의 차이등으로 몽골 사신이 올때마다 충돌이 벌어지고 그러던 어느 날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231년 몽골에게 침략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고 그렇게 28년간의 몽골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긴 싸움끝에 고려 태자 원종이 아버지를 대신해 몽골 칸 몽케를 찾아간다. 그런데 가던 길에 몽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때 원종이 다음 칸이 된 쿠빌라이를 찾아가서 기.. 더보기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6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