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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원인, 배경, 토벌작전: 부역자 색출방법 여순 사건이란? 광복 이후 정부 수립관련해 통일 정부 수립과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의견이 충돌한다. 그러던 중 1948년 제주도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 세력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이 사건이 제주 4.3 사건이다. 이에 정부는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에게 하달한다. 그러나 당시 14연대의 군인들 중 일부 세력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했고 1948년 10월 19일 , 전라남도 여수-순천에서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명령 불복종이자 내란이었다.   무장한 14연대의 군인들은 여수와 순천을 순식간에 장악했고 이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이어졌는데 정부는 이 소식에 계엄령을 발효하고 대규.. 더보기
벌교 꼬막이 유명한 이유 꼬막은 사계절 나지만 6월에서 8월이 꼬막의 주 산란기로 11월~3월 겨울이 꼬막 살이 통통하게 올라 가장 맛있는 제철이다. 정말 옛날에 꼬막은 너무 싸서 밥반찬이라기 보다는 간식으로 먹었다. 요즘음 밥반찬 뿐만 아니라 안주로도 꼬막을 많이 먹는다.   1. 갯벌 조건 모래가 많이 섞인 서해보다는 남해의 강진만, 보성만,여자만 등 만이 발달해 있고 이쪽의 갯벌 모래는 아주 곱고 사람이 들어가면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고운 갯벌이라 깨끗한 환경과 같힌 만 형태로 꼬막의 풍부한 영양 섭취에는 최적화된 조건으로 전국 꼬막의 85%는 전라남도에서 생산된다. 그 중에서도 벌교를 포함한 보성군에서 전라남도 꼬막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벌교는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하는 꼬막의 성지라고 볼수 있다.   상품.. 더보기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 일본의 치밀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운요호 사건신미양요 4년 후 1875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해안 측정을 핑계로 침범한 것이다. 일본군 군함에 딸린 작은 배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했고 예고없는 침투에 조선군은 포격을 가해 경고했다. 이에 일본은 일본 국기를 달았는데 공격했다고 자신의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에 대한 보복을 위해 강화도 옆 영종진을 침략해 조선군과 주민을 학살한다.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통상 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운요호 함장이었던 이노우에 요시카는 자신의 국가에 보고할때는 처음에 국기 게양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신미양요때 미국이 했던 방식과 똑같이 군함을 가지고 와서 강화도 앞바다에서 조선군을 도발하며 포격을 유도한 것이다. 이를 .. 더보기
우씨 왕후 이야기 : 언제까지 권력을 잡았을까?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인.. 드라마 우씨 왕후는 고구려 제 9대 왕 고국천왕과 고구려 10대 왕 산상왕은 형제관계로 두 형제모두 우씨왕후를 아내로 두었다. 우씨왕후는 형제와 결혼을 해서 두 번이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우씨왕후 시대적 배경고구려 초기 비류나부, 연나부, 계루부, 환나부, 관나부 5부족으로 이루어진 5부족 연맹체제였다. 5부의 장(대가, 소가) 들이 모여 고구려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제가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고 고구려 초기 5개 부족을 다스리는 군장의 힘은 왕에 맞먹을 만한 힘이었다. 5개의 부족 국가중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계루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5개 부족 연맹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또한 계루부 출신이다. 주몽 이후로도 고구려 왕 대부분은 계.. 더보기
한일 병합, 한일 합방, 경술국치의 뜻 맞는 용어는 무엇? 일본은 1910년 8월 29일을 '한일병합의 날'로 부른다. 한국이 일제의 일부가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이 지구상에서 폐멸됨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일본은 단어 하나에도 고심했다. '합병`'은 회사끼리 동등하게 합치는 것이라 합병이나 합방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열등한 한국과 등등하게 합친다는 의미가 있는 '합병과 합방'은 배제한 것이다.    '병탄'이 맞는 용어였으나 '병탄'이란 의미에는 일본의 침략적 야욕이 너무 드러나는 단어라 배제했다. 대내외적인 시선을 고려해 만든 용어로 고심 끝에 도출해낸 단어가 '병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병합'이란 말을 써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단어를 써야할까? 이 당시는 1910년 경술년이였고 국가가 경술년에 가장 큰 수치를 겪었다는 의미의 .. 더보기
강신무와 세습무의 차이 : 모든 무당은 작두를 탄다 ?! 중부. 이북지방은 무병(신병)을 앓고 무당이 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런 사람을 신이 내렸다고 해서 강신무라고 한다.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지방의 경우는 세습무가 많다. 부모가 무당이면 혈연 승계로 자식도 무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강신 경험이 없다.   그래서 무당이라고 모두 신이 내린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적인 요소들로 미디어에선 강신무의 모습이 대다수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맥 소설의 소화라는 무당이 나오는데 '소화'의 모습은 세습무이다.   반면에 영화 속 김고은(화림 역)은 강신무 역할이었다.  모든 무당이 작두를 탄다는 건 오해이다. 무당은 몸주 즉 무당이 신병을 앓을 때 강신하여 영력의 주체가 되는 신격이 있는데 그 신이 작두장군이나 작두대신이라고 부르는 신을.. 더보기
덕수궁 이야기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때 의주로 몽진한 후 1년 후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모든 궁궐이 불타버려 머무를 곳이 없어지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살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 월산대군의 증손자가 살던 석어당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선조가 살았으나 궁궐로 지어진 것이 아니기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다.    광해군 3년에 창덕궁이 완공되자 왕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이라 명명하게 된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된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되고 황후가 살해당한 경복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들어가 자주 국가 대한제국 설립을 추진한다.  고종은 원구단을 만든 후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대한제국 멸망 후 원구단은 일제에 의.. 더보기
공화국 구분 기준 : 6 공화국까지 간략역사 제1 공화국 : 이승만 정권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적 선거는 5.10 총선거로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이다. 이 선거를 통해 임기 2년의 200명의 의원이 선출되고 대한민국 헌법이 1948년 7월 17일 제정된다. 또한 간접 선거를 통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1차 개헌 제헌국회의 임기는 2년이었다. 1950년 5월 30일 2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고 이때 야당 성향 무소속 의원이 약 70% 당선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이 어려울 것을 염려해 직선제로 개헌을 한다.  이승만은 1952년 한국전쟁 중에 '공비소탕' 을 구실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1차 개헌을 강행한다.  2차 개헌제헌 헌법에는 대통령 임기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