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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사고방식의 근간 ..( 일본 우익재단 사사카와 재단이 하는일) 일본인 사고방식은 무엇?일본은 700년간 사무라이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일본 사람의 사고방식에는 손자병법적인 사고방식이다.  사무라이 사고방식이란 전략적인 지성을 바탕으로 한 칼의 문화이다. 싸우기 이전에 생각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상대를 연구하는 문화가 사무라이 사고방식의 기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여러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말처럼 일본은 독도 문제도 전략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진리냐 거짓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면 선이고 패배하면 악인 것이다. 이것이 사무라이 시대부터 내려온 역사적인 일본의 선악 개념이다.   그래서 일본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논리를 만들어 그 논리를 한국인에게도 주입시켜 한국인의 신념을 꺽어버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신 친일파를 양성하는 것.. 더보기
독도 분쟁 문제의 시작점은 언제부터 ? 한일 독도분쟁의 시작 1965년 6월 도쿄에서 해방 후 단절됐던 한일 간 외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협정으로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이때 일본은 독도문제를 걸고 넘어졌던 것이다.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회부하자는 것이었다.    오랜 협의 끝에 양국 간의 교환 공문을 체결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들끓던 상황이었고 이에 한국대표단은 한일협정 무효화를 하겠다고 하 독도명칭을 빼고 교환 공문을 체결하게 된다. 사실상 독도를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1965~93년까지는 독도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새로운 국제연합 해양법 조약그런데 1994년 UN총회에서 새로운 국제연합 해양법 조약을 발효했다. 1994년 이전까지는 자국 연안으로부터 약 22km 12해리에 불과했던 영해를 배타적 경.. 더보기
독도 분쟁 문제 국제사법 재판소 재소해야 할까? 한국의 전략은? 1993년까지는 일본의 독도 문제 주장에 무대응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대응을 할수 없게 되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고 이때 무대응을 하게되면 국제법상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은 독도 땅이라고 반박을 해야 한다. 반박하지 않을 경우 소극적 인정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재판소에 가도 충분한 증거가 있기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일부러 가지 않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독도는 분쟁 지역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독도가 일본 것인지 한국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재판 거부 불가 즉 관할권.. 더보기
한민족 역사 (한민족 기준이란 :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는 우리민족인가?) 한민족 시작점 조선시대 쇄국정책 이전에는 국경이 엄격하지 않아 고려 시대까지는 자유롭게 다른 나라를 이동했다. 동아시아에 쇄국의 질서가 만들어진 건 1800년 도 말이다. 조선은 흥선대원군 시대, 일본은 도쿠카와 시대, 중국도 청나라 시대였다. 이 균형이 꺠진 것이 아편전쟁이었다.   이 아편전쟁은 아시아가 서양 오랑캐에게 너무나 크게 깨졌고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강제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일본 -조선 순으로 강제 개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주민 역사 이때 쇄국정책으로 묶여놨던 조선인들이 만주 땅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만주 땅은 성지로 생각해서 중국인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빈땅으로 놔뒀는데 바로 그 땅으로 조선인들이 이주한다.   만주를 이어 연해주까지 개척.. 더보기
고려인들은 누구인가? 고려인들은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로 스탈린에 의해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했던 우리 민족이다. 고려인 이주는 우리 이주민의 역사 중 가장 큰 비극일 것이다. 이주 초기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인이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스탈린이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한국인이 일본인 편을 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연해주에 살던 모든 조선 사람 18만 명을 일주일 통보한후 가축 화물칸에 실어 중앙아시 사막에 던져 놓은 것이다.    이 강제 이주에 반발을 우려해 연해주의 민족지도자 약 2500명을 처형했고 당시는 광기어린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인종말살 정책으로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시기기도 했다.   이렇게 끌려간 고려인들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삶을 향한 지독한 노력으로 기적을 만들어 낸다. 국가가 돌.. 더보기
판다 외교의 시작은? 판다 특징 한국인의 행복 도파민 푸바오가 얼마 전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푸바오의 귀여운 얼굴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판다의 둥근 얼굴은 딱딱한 대나무를 하루종일 씹어야하기 때문에 턱 골격과 저작 근육이 발달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판다는 육식 동물 몸에 초식 동물 습성을 가진 동물로 소화 기관은 육식 동물에 가깝다. 내장 구조 탓에 대나무의 영양분을 잘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루 종일 먹는 것이다. 많은 대나무를 먹어야만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할수 있다.   푸바오가 중국에 간 이유 임차국에서 태어난 아기판다는 만 4세가 되면 중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 국제자연보전연맹 기중으로 판다는 멸종 취약종으로 구분되어 그에 관련된 국제적인 CITES 협약을 1973년 채택되었는데 멸종 위기에.. 더보기
단골의 어원 : 무속과 관련된 지명들. .(영등포, 관우신, 관우 신앙 등) 단골 어원 옛날 삼남지방에서 무당을 자주 찾아가는 사람을 단골이라 불렀다. 혹은 무당을 '단골' 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무당을 많이 찾아갔다는 의미이고 이 말을 지금까지도 가게에 자주 찾아가는 손님 단골 손님을 지칭할때 사용하고 있다.   무속신앙 관련 지명들 지하철역 신당역도 지금은 새로운 신자를 사용하지만 원래는 귀신 신자를 사용했었다. 신당(무당집)들이 모여 있던 동네가 신당동이다.   영등포역도 음력 2월에 영등신을 맞이하여 무사 안녕과 생업 풍요를 기원하는 굿인 영등굿을 하던 곳이다. 영등굿을 하던 포구라는 뜻의 영등포이다.   동묘 관우신 모신 이유 동묘역도 또한 원래는 동관왕묘로 관우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서 싸움을 하고 승리를 했는데 명나.. 더보기
빨간색 이름 쓰기 금지 속설 : 한국의 미신 풍습 배경 빨간색 이름 쓰기 미신 기원옛날 진시황 시절에 황제의 이름만 빨간색으로 썻다. 누군가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황제를 참칭하는 것으로 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된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속설은 6.25 전쟁 당시 죽은 병사를 빨간색으로 표기한다는 유언비어가 미신으로 정착했다.  미신의 효능 (미신을 믿는 이유) 미신을 믿는 것이 인간을 생존 시켰다는 과학적 견해가 있다. '마이클 셔며'라는 과학자는 인간에게 믿음 엔진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관계가 없는 요인들 사이에서 패턴을 발견하는 것으로 인간은 믿음 엔진을 갖고 태어났다고 가정하며  원시 시대에 조류를 계산해서 바다에 나가거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인지 판단하려면 잎모양, 냄새 등 패턴을 알아야 했기에 경우에 따라 그것..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