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썸네일형 리스트형 무주 적상산 사고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경기전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외사고 실록의 보관소가 있던 곳이다. 경기전에 딸려 있는 작은 건물 실록각이다. 조선 초기 춘추관과 충주에 보관된 2부의 실록각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총 네 군데에 실록을 보관한다. 이 실록은 읍성 도시 한가운데 보관되었고 보안은 물론 화재의 위험도 컸다. 실제로 성주사고에서는 사람들이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불을 피우다 사고가 홀딱 타기도 했다. 130년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이 북상한 순서대로 사고들이 불타 버린다. 성주, 충주, 춘추관사고에 불이났고 정유재란때는 이곳 전주사고까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실록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1592년 4월.. 더보기 태백 이야기: 황지 연못 (낙동강 발원지), 탄광 개발 역사/자미갱 함백탄광 사고 하늘 아래 첫 동내 태백에 가면 대한민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름을 쓰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정류장을 세울 당시 아무것도 없어서 집주인 이름을 붙인 정류장이 탄생한 것이다. 태백 황지 낙동강 발원지 태백 시내 한가운데 영하 18가 되도 얼지 않는 연못, 황지연못이 있다. 이곳은 하루 5000톤 넘는 물이 솟고 연중 수온은 영상 15도 일정한 샘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늘 넘친다. 그 물이 흘러흘러 남쪽 바다, 남해로 흘러가 1300리 낙동강의 발원지가 황지이다. 연못 밑에 용궁이 있는데 가끔 용이 몸을 흔들어서 바닥 청소를 하면 물거품이 솟구쳐 연못이 누렇게 된다고 한다. 태백한 아래 황지는 예로부터 유명했다. 또 다른 전설 옛날에 이 연못가에 심보 고약한 황 부자가 살았는데 스님.. 더보기 태백 검룡소 : 한강의 발원지가 아니다? ! 삼수령 자동차가 넘을 수 있는 고개 중 2번째로 높은 두문동재는 첩첩산중으로 이곳 고갯길 피재를 지나면 태백으로 올수 있다. 피재라는 이름은 옛날 전쟁을 피해 이곳에 사람들이 왔다고 해서 피재이다. 현재 피재는 삼수령이라고 부른다. 환란을 피해 온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다. 피재에 비가 오면 어떤 빗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면 한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내리면 낙동강, 동쪽으로 흘러내리면 오십천이 된다. 이 피재 고개 위로흘러내리는 빗물이 세 갈래로 나누어지면서 삼수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예로부터 물이 흐르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나라가 세워졌다. 태백 검룡소 금대봉 자락 해발 954m 산중턱에서 솟는 작은 샘은 사시사철 얼지도 않는 연못이 있다. 겨울 금대봉 눈길을 20여 분 올라오면 물소리가 들.. 더보기 덕유산 무주 구천동 계곡: 의병장 문태서, 서벽정 무주 구천동 이름 유래 구천동 이름에서 전해오는 신기한 전설이 많다. 조선 중기 임훈 에는 성불공자 구천 명이 이곳에 은둔했는데 그 스님들이 흘려보낸 쌀뜨물로 아침마다 계곡물이 뿌옇게 흐렸다고 한다. 수련 중인 남편을 찾아 구천동을 떠돌던 한 아내가 남편은 찾지 못하고 첩첩산중 골짜기에서 길만 여러번 잃었다. 그만큼 산과 계곡이 깊다는 곳이다. 또 다른 얘기는 구씨와 천씨가 많아 마을 이름을 구천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주 구천동 33경 구천동 명칭의 유래만큼 수많은 절경을 품은 계곡이 많은 곳이고 33개의 절경이 있다. 덕유산 향적봉은 해발 1614m 로 구천동 계곡 33경 속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의병장 문태서 순국비 덕유산 무주 구천동 계곡에 문태서 순국비가 있다. 1880~191.. 더보기 1948년 런던 올림픽: 최초의 복권 대한민국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하계 올림픽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공식 참가했고 이때 대한민국 선수단의 기수는 손기정 선수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지독히 가난했던 나라로 국제대회 참가할 비용이 없었다. 그래서 복권을 이용해 돈을 모으기로 한다. 1947년 처음으로 올림픽 후원권이라는 복권이 발행된다.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최초의 복권을 발행해 대회 참가 비용을 마련했다. 국제 사회에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런던까지 가는 여정은 고행이었다. 당시 해외를 나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했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요코하마까지 기차로 이동 , 요코하마에서 다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가서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지만 여러 군데를 경유 .. 더보기 한국 전쟁 속 스미스 부대와 지게 부대 이야기 6월 27일 미군은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6월 29일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은 전용기를 타고 한강 전선에 도착한다. 그리고 1950년 7월 1일 당시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 24사단 34연대에서 선발한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고 그들이 부산항에 도착한다. 스미스 부대 전력 당시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된 체제 개혁으로 인해 일본에 있던 미군이 많이 철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군 부대 인력뿐 아니라 장비나 무기도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스미스 부대를 꾸릴때 전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스미스 부대의 전력 또한 2개 보병 중대, 4.2 인치 박격포 2대 소대, 무반동총 사수 1명, 6인치 바주카포 6개 팀 정도를 갖춘 후방의 작은 대대 정도의 전력이었다. 그래서 스미스 .. 더보기 창덕궁 낙선재 이야기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사랑채이자 경빈 김씨의 처소 석복헌(하늘에서 큰 복을 내려준다) 이 있는 곳이다. 또한 할머니 순헌왕후의 처소 수강재가 있다. 낙선재를 만든 이유 낙선재는 헌종의 헌신적인 사랑이 깃든 곳이다. 헌종 9년 효헌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에 눈을 감고 만다. 다음 해 새 중전을 뽑기 위해 삼간택을 하고 헌종은 전례없이 간택에 참여한다. 그때 헌종은 김씨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명헌왕후 홍씨를 선택하고 헌종은 어쩔수 없이 명헌왕후를 대비로 들인다. 하지만 헌종의 김씨에 대한 마을을 지울 수 없었고 3년이 흐른 뒤 헌종은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비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한 보금자리로 즐거움이 오래가라는 의미에서 즐거울 낙, 착할 .. 더보기 정조 융릉(사도세자), 원릉(영조) 조성 이유 , 배경 정조 사도세자 능을 옮긴 이유 정조는 어린 시절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버지 죽음을 모두 시켜봤다. 그리고 즉위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한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사도세자(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 융릉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도사제는 지금 서울시립대가 있는 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혀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사당 경모궁을 조성하고 14년의 계획 끝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성 인근으로 이장한다. 이유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물기가 많고 뱀이 출몰하는 흉지라고 생각해 왕이 된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닌 끝에 1789년 수원 화성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한다. 현재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융릉 앞 문인석의.. 더보기 세종대왕 묘 영릉을 이장한 이유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승하했다. 맏아들 문종은 유언에 따라 태종 세종의 부모님이 있는 헌릉 인근 수릉지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런데 그 터를 두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장남을 잃고 손이 끊어지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최양선의 말때문인지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457년 10월 21일 문종의 외아들 단종 마져 17살에 사망하게 되니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 역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이 20살에 사망한다. 예종의 맏아들 인성대군도 3살때 죽었다. 결국 세종의 영릉은 여주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날 33)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를 이장한 이유 문종은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예체능,병법에도 능.. 더보기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모스크바 3상 회의 해방 후 소련과 미국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구실로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소련은 김일성을 통한 간접 통치를 시작하게 되고 미국은 군정을 통해 직접 통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이 모여 당사자인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 문제를 비롯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러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협의하는 회의였다. 1945년 12월 29일 당시 남한에 들어와 있던 미군 측이 서울의 한 거리에서 신탁통치를 한다는 벽보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찍은 것이다. 신탁통치란?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 자본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팽팽한 이념 대립.. 더보기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3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