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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독도 분쟁 문제 국제사법 재판소 재소해야 할까? 한국의 전략은? 1993년까지는 일본의 독도 문제 주장에 무대응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대응을 할수 없게 되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고 이때 무대응을 하게되면 국제법상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은 독도 땅이라고 반박을 해야 한다. 반박하지 않을 경우 소극적 인정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재판소에 가도 충분한 증거가 있기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일부러 가지 않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독도는 분쟁 지역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독도가 일본 것인지 한국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재판 거부 불가 즉 관할권.. 더보기
한민족 역사 (한민족 기준이란 :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는 우리민족인가?) 한민족 시작점 조선시대 쇄국정책 이전에는 국경이 엄격하지 않아 고려 시대까지는 자유롭게 다른 나라를 이동했다. 동아시아에 쇄국의 질서가 만들어진 건 1800년 도 말이다. 조선은 흥선대원군 시대, 일본은 도쿠카와 시대, 중국도 청나라 시대였다. 이 균형이 꺠진 것이 아편전쟁이었다.   이 아편전쟁은 아시아가 서양 오랑캐에게 너무나 크게 깨졌고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강제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일본 -조선 순으로 강제 개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주민 역사 이때 쇄국정책으로 묶여놨던 조선인들이 만주 땅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만주 땅은 성지로 생각해서 중국인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빈땅으로 놔뒀는데 바로 그 땅으로 조선인들이 이주한다.   만주를 이어 연해주까지 개척.. 더보기
고려인들은 누구인가? 고려인들은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로 스탈린에 의해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했던 우리 민족이다. 고려인 이주는 우리 이주민의 역사 중 가장 큰 비극일 것이다. 이주 초기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인이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스탈린이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한국인이 일본인 편을 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연해주에 살던 모든 조선 사람 18만 명을 일주일 통보한후 가축 화물칸에 실어 중앙아시아 사막에 던져 놓은 것이다.    이 강제 이주에 반발을 우려해 연해주의 민족지도자 약 2500명을 처형했고 당시는 광기어린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인종말살 정책으로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시기기도 했다.   이렇게 끌려간 고려인들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삶을 향한 지독한 노력으로 기적을 만들어 낸다. 국가가 .. 더보기
단골의 어원 : 무속과 관련된 지명들. .(영등포, 관우신, 관우 신앙 등) 단골 어원 옛날 삼남지방에서 무당을 자주 찾아가는 사람을 단골이라 불렀다. 혹은 무당을 '단골' 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무당을 많이 찾아갔다는 의미이고 이 말을 지금까지도 가게에 자주 찾아가는 손님 단골 손님을 지칭할때 사용하고 있다.   무속신앙 관련 지명들 지하철역 신당역도 지금은 새로운 신자를 사용하지만 원래는 귀신 신자를 사용했었다. 신당(무당집)들이 모여 있던 동네가 신당동이다.   영등포역도 음력 2월에 영등신을 맞이하여 무사 안녕과 생업 풍요를 기원하는 굿인 영등굿을 하던 곳이다. 영등굿을 하던 포구라는 뜻의 영등포이다.   동묘 관우신 모신 이유 동묘역도 또한 원래는 동관왕묘로 관우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서 싸움을 하고 승리를 했는데 명나.. 더보기
빨간색 이름 쓰기 금지 속설 : 한국의 미신 풍습 배경 빨간색 이름 쓰기 미신 기원옛날 진시황 시절에 황제의 이름만 빨간색으로 썻다. 누군가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황제를 참칭하는 것으로 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된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속설은 6.25 전쟁 당시 죽은 병사를 빨간색으로 표기한다는 유언비어가 미신으로 정착했다.  미신의 효능 (미신을 믿는 이유) 미신을 믿는 것이 인간을 생존 시켰다는 과학적 견해가 있다. '마이클 셔며'라는 과학자는 인간에게 믿음 엔진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관계가 없는 요인들 사이에서 패턴을 발견하는 것으로 인간은 믿음 엔진을 갖고 태어났다고 가정하며  원시 시대에 조류를 계산해서 바다에 나가거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인지 판단하려면 잎모양, 냄새 등 패턴을 알아야 했기에 경우에 따라 그것.. 더보기
평양에 남은 고구려 유적 (주몽 무덤, 동명왕릉이 북한에? ) 평양성  장수왕때 고구려가 평양성을 지을때 남긴 금석문 자료가 존재한다. 각자성석으로 글씨를 새긴 성 돌이다.   각자성석은 일명 실명제로 성벽을 쌓을때 성벽이 무너지거나 누군가 게으게 일하다 잘못쌓거나 하면 안되기 때문에 책임을 지우기 위한 시스템인 것이다. 그래서 성벽 곳곳에 각자 성석을 박아놓았다. 그중 하나는 일제시대 도로공사 중 옥류관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 평양성의 명승지로 고구려 시대의 성곽이 아직도 남아있다. 을밀대는 적을 감시하고 군대를 지휘했던 망루라고 볼수 있다.  동명왕릉? 남한과 북한의 연구가운데 엇갈리는 역사적 해석이 있다. 주몽의 무덤으로 동명왕릉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평양에서 후기 형태의 무덤에 묻힐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주몽은 고구려의 수도 졸본에서 .. 더보기
강화도 외규장각 강화도의 또 다른 역사 유적 고려궁지가 있다. 고려 궁지안에는 조선시대 외규장각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간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 어람용 의궤어람용 의궤 표지는 특별히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선을 둘러 왕실의 위험을 더하였다.   외규장각 복원을 추진하게 된 것은 1991년 서울대 규장각에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병인양요 당시 약탈된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촉구하였고 외규장각 도서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외규장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무엇이 다른가? (의궤의 가치)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무엇이 다른가? (의.. 더보기
주몽 탄생 건국신화 의미 - 고구려 , 백제, 신라의 탄생 고구려 주몽 탄생신화는 고구려, 백제의 탄생과 관련이 깊다. 주몽 탄생 신화를 보면 고구려가 탄생하기 전 부여나라는 나라가 있었고 부여 신의 아들인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강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를 만나 연애를 하게 되고 둘 사이에서 알이 탄생한다.    이 알을 깨고 주몽이 태어난다. 알에서 태어난 뒤 부여왕 슬하에서 자랐는데 목숨의 위협을 받아 부여를 탈출해 비류곡 졸본에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신화란 정치적 정당성,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을 하늘의 천자나 신격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것은 거짓이나 이 신화에서 알수 있는 것은 주몽이 타지에서 온 왜래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숭상한 동물 고구려는 개구리를 숭상했는데 사료에 고구려 주몽의.. 더보기
고구려 벽화 특징 고구려 무덤에 들어가면 벽화가 무덤의 천장과 사면을 두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새로운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해서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 가졌던 것을 누릴 수 있도록 소중히 여긴 물건들을 함께 묻어 주었다. 이 풍습이 지나면서 무덤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초기 고구려 벽화 3세기 말~5세기 초는 주로 묻힌 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생활 풍속도가 많다. 이승의 삶을 사후에도 이어가려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무덤 주인의 평소 생활 모습을 묘사한 것이 많다.  안악 3호분 행렬도 : 묘주의 행차 모습을 그린 것으로 묘주의 생전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생활풍속도에는 묘주의 신분과 권위를 증명하는 풍경이 주로 묘사되어 있다.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는 생활.. 더보기
영문 이름 코리아는 어디서 시작되었나? 일반적인 내용을 확인했을 때 코리아 Korea 라는 이름은 태조 왕건의 국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고려 시대 아랍 상인들이 고려를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해 고려를 코리아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고려라는 이름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한국의 영문명 KOREA의 어원이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려는 고구려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충주 고구려비뿐만아니라 구당서, 수서등 일부 중국 사료에서도 고구려의 국호를 고려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태조 왕건이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쳐하며 국호를 고려로 결정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영문표기 코리아는 고구려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나?! 근거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