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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조선왕릉과 풍수 이야기 조선왕릉의 터를 선택할 때 기준? 명릉도는 숙종과 인현왕후 , 인원왕후의 능을 나타낸 그림인데 산맥과 물줄기가 좌오로 감싸고 있는 지형에 왕릉을 조성한다. 풍수지리학자가 볼때 최고의 능은 세종의 영릉, 세조의 광릉, 인조의 장릉 등이 있다. 세종대왕 묘 영릉은 회룡고조 형으로 앞쪽에 조산을 바라보고 능선이 무덤을 감싼 ,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 형국이다. 세종대왕 묘 영릉을 이장한 이유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승하했다. 맏아들 문종은 유언에 따라 태종 세종의 부모님이 있는 헌릉 인근 수릉지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런데 그 터를 두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장남을 잃고 손이 끊 myvoice.wissue.net 왕릉 주변의 조형물들 의미? 무이석, 문인석은 무신과 문신을 의미하고 동물상으.. 더보기
학도병 이야기 : 포항여중 전투 의의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이 함락 되고 더욱 거세진 북한의 공세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때 마지막 방어선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군번도 없던 학도병이었다. 학도병의 공식 명칭은 학도 의용군이다. 한국 전쟁 발발 3일 후 6월 28일 수원에서 구국 비상학도대를 조직했고 29일 바로 한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된 기록이 있다. 학도의용군이란? 학도의용군이라는 말 자체가 전쟁 중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조직되는 무력집단이라는 뜻으로 전시에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자원한 학생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원래 징집 대상 연령은 18세 이상으로 학생은 징집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전시가 되니 학생들이 나라의 위험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 개별적으로 입대한 것으로 학생들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군번도 지급되지 않.. 더보기
장사리 전투: 인천상륙작전의 기만작전 기민작전이란? 장사리 전투는 아군의 정보를 적에게 오판하도록 유도해 적을 유인하는 계획적인 작전활동으로 인천상륙작전의 기만작전이었다. 원래 상륙작전 시 기만작전을 병행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도 파 드 칼레 혹은 스칸디나비아반도등 다른 지역으로 기만작전을 시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의 기만작전은 여러개가 있다. 9월 12~14일까지 미군과 영국군의 양동상륙작전이 있었으나 큰 소득이 없이 끝난 전투였고 9월 14일 삼척에서 해안에 함포 사격등이 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기만작전 중의 하나가 장사리 전투였다. 장사리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 장사리의 위치는 포항 일대로 포항 기준 북쪽으로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200고지를 탈환하고 보급로를 뺏기 위한 상륙작전이었다. 이때 투입.. 더보기
세검정 유래 : 인조반정 세검정에서 무슨 일이?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시대 정자 세검정이 있다. 이곳은 1623년 광해 15년 한무리는 세검정에 모여 허리에 찬 칼을 흐르는 물에 씻어내며 함께 죽기를 칼로 맹세한 후 1623년 3월 12일 반정세력 능양군, 이귀등이 이끈 병사들이 창덕궁을 기습한다. 목표는 인정전에 있는 광해군이었다. 신하가 임금을 몰아낸 두 번째 사건 인조반정이었다. 세검정 앞으로는 홍제천이 흐르는데 홍제천에서는 조선왕조 실록이 완성된 후 실록의 초고들을 물에 씻어 글씨를 지우는 일을 했던 곳, 세초를 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인조 반정때 궁궐로 쳐들어가기 가장 좋은 지름길이 북쪽의 창의문을 통과해서 가는 것인데 창의문 바로 아래 시내가 흐르고 정자가 있는 그곳이 세검정이다. 능양군은 누구? 중종반정과는 달리.. 더보기
연평도 포격전 : 북한은 왜 연평도를 공격했나? 연평도는 꽃게가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2010년 11월 23일 서해 5도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었다. 휴전이후 최악의 교전이다. 서해 5도는 군사적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서해 5도에 해병을 배치하여 북한의 해상 도발을 방어할수 있다. 더불어 북한 공군까지 방어할수 있다. 이 중에 연평도는 북한 강령반도와 12km 거리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섬이다 . 북한의 연평도 공격 연평도에 떨어진 170여발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섬 전체가 검은 연기로 가득찼고 민간이 사상자까지 발생한다. 종전 이후 처음으로 민간지역을 겨낭한 공격이었다. 민가를 포격한 전쟁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CCTV를 통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 상황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이때 북한이 목포물을 불태.. 더보기
승정원 일기 삭제 사건 승정원 일기란? 승정원 일기는 우리나라 역사 최대의 기록물로 세종때부터 작성된 기록으로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정사 내용과 문서를 종합해 기록한 업무일지인데 인조(1623년) 부터 고종 (1910년) 까지의 기록만 전하고 있고 안타깝게도 광해군 때의 승정원 일기는 볼수가 없다. 총 책수는 3,243 책으로 조선왕조실록의 3배 이상의 분량이다. 승정원 일기 표지 중앙에는 기록 주체인 승정원 이름이 적혀있고 양 옆으로는 해당 기록의 년도를 표시했고 표지가 낡아 바꾼 경우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조선왕조 실록은 4부를 만들었으나 일일이 손으로 적은 필사본 1부만 남은 승정원 일기이다. 천년을 간다는 삼베로 표지를 만들어 기록을 후대에 오래도록 남기려는 승정원 사람들이 마음이 담겨있다. 승정원 일기는 국방상 중.. 더보기
한미동맹 상징 카투사 역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배경 중요성 한미상호방위조약 배경 연합군은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이며 6.25 전쟁을 끝내는 듯 했으나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정전 협상이 진행된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반대 의사를 밝히고 1951년 7월 1일이 국민들의 정전 반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런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정전 회담이 시작된다. 그러나 좁혀지지 않는 의견으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38선을 중심으로 고지전에 돌입한다. 정전협정 제안 전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하는 정전 협정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정전협상 회담이 개최된 이후 무려 2년간 이어진다. 막대한 전쟁 비용, 군사 병력 소모 등 그 .. 더보기
불국사 이야기: 석가탑, 다보탑, 가람배치 , 그렝이 공법, 구품연지... 불국사는 1995년 12월 9일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문무왕 16년(676년)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이후 수백년간 전성기를 누린다. 신라의 전성시대에 경주에 18,000 호가 살았고 초가집이 없고 모두 기와집이였다.  불국사 창건 배경불국사 창건 당시 신라의 경계가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로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강력한 왕권과 국제교역을 통해 얻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그들만의 화려하고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불국사가 가장 컸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려 80 여 종의 건물이 있었고 상주하는 승려 수가 1000~2000명 정도되는 대규모 사찰인 기록이 확인된다.    불국사는 토암산 자락에 위치한다. 토암산의 뜻은 '.. 더보기
기생 논개 , 산홍 이야기 : 의가사 , 의암바위에 새겨진 글은 무엇? 논개 이야기 진주성은 경남 진주시 남성동과 본성동 일대에 있는 고려 시대~ 조선시대 성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이곳에 조선시대 의기 (의로운 기생)을 만들수 있는 곳이 있다. 진주성 이야기 김시민(1차 진주대첩), 황진장군(2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3대 대첩하면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이 있다. 진주대첩은 1차 진주성 전투를 진주대첩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잘 알려진 논개는 2차 진주성 전투의 등장인물이다. 1차 진주성 전 myvoice.wissue.net 1592년 조선군 3800명과 의병은 5배가 넘는 2만여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한다. 그러나 다음해 1593년 9만이 넘는 일본군이 또 쳐들어와 조선은 참패한다. 이때 조선의 민, 관, 군 6만 명이 학살당한다.. 더보기
두향지묘 : 이황과 두향의 사랑이야기 모두 거짓? !! 소백산과 남한강이 만나서 생긴 충북 단양의 청풍호에는 조선 시대 10대 명기 중의 한 분이자 단양의 관기 기생 두향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두향이라는 기생은 빼어난 용모와 거문고와 시에 능했던 기생으로 그녀가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 퇴계 이황이다. 1548년 단양 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28살의 나이차에도 단양 관기 두향을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1년도 되지 않아 풍기 군수로 이황은 떠나야 했다. 상심한 두향은 기생을 그만두고 강선대에 움막을 짓고 홀로 지낸다. 22년 후 세상을 떠나기 전 이황의 마지막 유언이 이러했다. 상심한 두향은 강선대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다. 그렇다고 두향이라는 기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 임방의 수촌집에 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