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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김유신 : 삼국통일 진실은? 계획에 없었다 ?! 천년 신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 경상북도 경주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곳곳에 신라 1000년의 역사와 보물이 숨어 있다. 김유신 이야기 경주 송화산 초입 화려한 무덤 하나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 장군이다. 1970년 남북이 분단되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대통령 박정희는 북쪽을 바라보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경주 황성공원에 세웠다. 김유신은 그 예전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되었고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가 열전으로 3권이 있다. 그러나 김유신은 경주 사람(경주 김씨)이 아니다. 신라가 멸망시킨 가야의 후손 김해 김씨이다. 또한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진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유신은 부모님이 거처를.. 더보기
허준 무덤 이곳에? : 허가바위에서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집필까지.. 허준 무덤 임진왜란때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다. 이때 모두 86명이 따라갔는데 내시가 24명, 마구간 지기 6명, 의관이 2명, 별좌와 사알(심부름꾼)이 2명이였다는 기록이다. 이때 의관 2명중 한 사람이 허준이었다. 그는 선조를 수행했던 왕실 주치의였다. 이곳에는 세 개의 묘가 있다. 부인 안동 김씨, 허준 어머니 , 허준이렇게 세 사람의 묘로 추정된다.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가 양천 허씨 족보를 바탕으로 하포리를 뒤져서 허준과 관련된 비석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전남 진주박물관에 있는 태평회맹도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잘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호성공신이라는 훈장을 하사하 임금이 선물한 그림이다. 호성공신 양평군 허준이라고 적혀있다. 허준은 죽어서 양평군이라는 직위를 받게 .. 더보기
고랑포, 호로고루 이곳 어디? 고랑포 임진강에서 가장 폭이 좁고 얕은 고랑포는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고랑포에서 결정될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2002년 남북평화협력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에서 제작해 한국에서 전시된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릉비를 고구려 유적지 고랑포에 세웠다. 호로고루 임진강 남쪽 절벽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로고루가 있는 이곳은 옛날 1500년전 삼국시대에 치열한 전쟁터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전쟁을 벌였던 곳이다. 호로고루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피비린대 나는 전쟁을 벌었다. 보리밭 언덕 넘어 흐르는 강이 임진강인데 그 임진강을 옛날 사람들은 '호로하' 라고 불렀고 그 언덕 위에 있던 요새를 호로고루라고 부른다. 5세기 장수왕 시대 고랑포를 건넌 고구려 군이 세운 성채이지만 높지는 .. 더보기
창덕궁 이야기 1997년 12월 창덕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서울 5대 궁궐 중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고 볼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이지만 현재의 창덕궁은 동궐도와 비교해 보면 옛 모습의 20% 정도이다.    1395년 경복궁이 가장 먼저 세워지고 태종때 창덕궁이 만들어진다. 성종때는 왕실에 대비들이 많아서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선조가 갔다왔다는데 3개의 궁궐이 모두 소실되어 임시로 정릉동 행궁에 모셨는데 이것이 궁궐로 발전하면서 경운궁이 되었다. 나중에 고종 황제가 이곳에 계속 거처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이 새로운 궁궐을 짓고 싶어했고 그렇게 해서 지은 궁이 경덕궁인데 영조.. 더보기
가야 시조 탄생 설화 및 나라를 넘긴 마지막 왕 이야기 가야국 시조 탄생 설화 가야 왕국의 시조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등장하는 구지가는 일연의 에 기록된 가야 시조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김해땅, 구지봉 산 아래 살던 아홉 족장들은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따라 구지가를 부르니 하늘에서 황금 상자가 내려오고 그 속에 알 여섯개가 들어있다. 이후 알에서 깨어난 사내아이 6명이 후에 여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됐다. 그 중에서도 가야 연맹국의 중심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왕이다. 가야의 마지막 왕은 누구? 그러나 주변 열강의 침입으로 약 500년의 역사를 끝으로 신라에 금관가야는 멸망하게 된다. 서기 532년 신라와 금관 가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금관가야 구형왕이 나라를 통째로 신라에 넘긴다. 가락국은 고대 국가 가야를 뜻하고 양왕.. 더보기
합천 함벽루 : 대야성 전투 김춘추 복수극의 시작.. 합천 함벽루 경상남도 합천 황강벽에는 함벽루가 있다. 합천하면 해인사를 많이 떠올리지만 합천에는 다른 볼거리도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함벽루인데 이 작은 정자에 많은 문인이 찾아와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 남명 조식 (1501~1572) , 퇴계 이황이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또한 구한말 의병장 이범직 또한 자신의 글을 이곳에 남겼다. 조선 중기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로 이 세사람을 빼고는 성리학, 정치, 유학을 논할수 없는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이다. 을사늑약 당시 황제 고종을 윽발질러 나라를 팔아먹는데 도장을 찍게 만든 을사오적 중의 한 사람 이은용(이지용)의 이름도 커다랐게 새겨져 있다. 대야성 위치, 흔적들 7세기 초 신라와 백제는 격렬한 영.. 더보기
고려청자 : 일본인만 알아본 강진 도자기.. 강진 고려청자 2007년 5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된다. 58살 어부 김용철이 바다에 던진 주꾸미 통발에 주꾸미 한 마리가 걸려 올려졌다. 그런데 그 주꾸미의 빨판에 파란색 대접하나가 딸려온 것이다. 무려 12세기의 2만 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싣고 가던 보물선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고려청자가 한꺼번에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고려청자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였던 것은 목간이었다. 이 목간에는 탐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이 배는 탐진에서 출발해 고려 수도 개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 목간 덕분에 강진산 고려청자의 명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강진은 청자 생산에 알맞은 조건인 품질 좋은 흙과 풍부한 뗄감 그리고 강진만을.. 더보기
다산초당, 사의재 : 정약용의 강진 유배생활 어땠을까? 조선시대 사형 다음가는 형벌은 유배형이었다. 죄의 경중에 따라 2000리, 2500리 등으로 유배지 거리가 정해진다. 유배가 무서운 이유는 언제 유배가 끝날지, 언제 사약이 내릴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의학에도 능통했고 간축과 토목, 각종 정치, 철학, 경제 모든 방면에서 능했다. 정약용은 누구? 조선 22대왕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정약용은 유배생활중 강진 산골짜기 다산초당에서 500권이 넘는 책을 썻다. 조선 왕조 500년 사상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홍역 치료에 관한 의서 마과회통, 정조의 능행차를 위한 한강에 배다리를 고안, 수원화성 축성을 위해 거중기를 설계하여 노동력과 건설비용을 절감시켰다. 이 거중기 덕분에 10년을 예상했던 수원화성 축조를 .. 더보기
하멜의 유배지 강진 전라병영성 , 여수 진남관 350년전 1668년 유럽에서 당시 조선에서 화란이라고 불리던 유럽 최강국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출판한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 북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상업과 해운업이 발달한 유럽의 경제 대국이었다. 하멜 표류기 1653년 8월 22일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스페르베르호는 거친 파도로 침몰하게 되고 36명의 선원이 낯선 제주도 땅에 상륙하게 된다. 이중에 헨드릭 하멜도 있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목 관아로 이송되 조사를 받게 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하멜 일행은 그렇게 두 달 일주일동안 조사를 받게 되고 마침내 한양에서 조사관 겸 통역관 박연이 내려온다. 그는 같은 국적인 네덜란드 사람으로 본명은 벨테브레였다. 하멜 일행보다 26년 먼저 제주에 표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 더보기
장진호 전투 6.25 전쟁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군 참전이다.  6.25 전쟁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바로 중국군 개입때이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오던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국군 제1군단의 진격이 계속되었다. 원산도 점령하고 전쟁이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갑자기 인민지원군이라는 중국군 26만명이 전쟁에 개입한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밀려내려오게 되면서 1950년 11월 27일 미국과 중국의 전면전 장진호 전투가 벌어진다. 미국이 중국군과 처음 싸운 전투로 미 해병 1사단은 1만 2천여 명정도였고 중국군은 12만명이었다. 10배 많은 중국군을 상대로 굉장히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무려 14일간 사투를 벌였던 전투이다. 미국 전쟁사에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