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북한산 승가사와 고려 현종 고려시대 북한산은 삼각산으로 불렸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봤을때 북한산의 세 봉우리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여 삼각산이라 불렸다. 이 삼각산에 정종, 문종, 선종, 숙종,예종, 의종등 수많은 고려의 왕이 행차했었다. 북한산 승가사는 756년 신라 경덕왕 15년에 승려 수태에 의해 창건된 절로 당나라때 큰 업적을 쌓았고 생불로 불렸던 승가대사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담긴 절이다. 이 절에 고려 현종의 흔적이 있다. 승가사 약사전에는 승가대사 불상이 있는데 불상 광배 뒷면에 글이 적혀 있다. 승가대사는 정수리 구멍에 솜으로 막아놓은 구멍이 있었다. 이것을 낮에 막아놨다가 밤에 구멍을 열면 향기가 나와서 방에 퍼져 좋은 냄새를 풍겼다고 했고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들이 그 물을.. 더보기
38선으로 나뉜 이유 : 트루먼 독트린 영향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 제 2차 세계대전 (1939~1945) 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계속된 전쟁에 세계는 대혼란에 빠지고 수세에 몰린 독일의 항복으로 1945년 5월 끝나는 듯 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으로 인해 1945년 미국은 일본에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일본은 유일한 핵무기 실전투입 사례의 전쟁국이 되었다. 이로인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38선을 나눈 이유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동시.. 더보기
5.10 총선거: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 해방 이후 한반도의 정부수립 문제를 두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세 차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의 입장차이로 결국 UN에 한반도 문제를 회부하게 된다.  이에 UN은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가 수립안을 통과시키기로 하려했으나 북한은 UN의 결정을 거부한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독제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으나 외부적으로는 평화공세를 하고 있던 때였다.  인구수를 보더라도 남측의 의석수가 많아서 북한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남한만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 5.10 총선거란? 1948년 5월 10일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일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기 위한 국회 구성을 위해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었다. 5.10 총선거는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다. 5.10 총선거는 대통령 선거가 아니다.  5.1.. 더보기
고려 거란의 3차 침입 : 강감찬 귀주대첩 , 흥화진 전투=삼교천 전투 [이전글] 거란 2차침입 1018년 12월 거란의 3차 침공이 있었다. 이번에 성종이 대신 오지는 않았으나 대신에 거란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소배압은 1차 침입때 서희와의 담판으로 유명했던 소손녕의 형이었다. 그리고 2차 침공때 개경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소배압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대비해 고려군 20만 8여 명을 준비했고 고려를 이끄는 장군이 강감찬 장군이었다. 강감찬 흥화진 전투 (=삼교천 전투) 거란군의 기존 루트는 흥화진, 통주, 곽주를 거쳐 서경으로 오는 경로였기에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첫 전투를 대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2차 거란 침입때 양규 장군이 목숨걸고 지켜냈던 곳이다. 흥화진 전투에서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 근처 삼교천이 흐르고 있었고 지형이 좁아지는 .. 더보기
105인 사건 : 신민회 해산을 위해 일제가 날조한 것은? 지속적인 구국활동에도 자주독립국가의 길은 멀기만 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한 강제 외교권 박탈과 통관부 설치로 내정을 장악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제 2차 평화 박람회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사건이 들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다. 1910년 경술국치의 한일 합병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국권 상실에 이르게 된다. 105인 사건 1911년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을 사전에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독립운동가 600여 명을 검거한다. 아래 사진은 1911년 9월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신민회 인사들이다. 이 당시 죄수가 밖으로 나갈때 반드시 용수를 썻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되고 그로부터 약 3개월 후.. 더보기
서희의 외교 담판: 거란의 1차 침입 [이전글]천추태후 이야기 거란과 고려는 태조 왕건때부터 악연이 시작된다. 당시 조선은 거란을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만부교 낙타 사건 993년 고려가 건국된지 75년 되는 해로 이때가 고려 건국이래 처음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앞으로 27년 동안 거란의 큰 공격만 3 차례를 받게 된다. 거란과의 봉산군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선봉군 대장마저 포로로 붙잡혀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안융진 전투가 벌어지고 이번에는 고려군이 승리하면서 다급해진 거란 장수 소손녕은 초조해지면서 협상을 제안한다. 당시 고려의 대신들은 고려 영토의 일부를 내놓자고 했으나 서희가 이를 반대하며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소손녕은 고려를 신라를 계승한 땅이라고 말했고 이에 서.. 더보기
거란의 2차 고려 침입: 강조와 양규 장군의 죽음 [이전글] 거란 1차 침입 993년 거란의 1차 침략 이후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켜 천추태후를 권좌에서 몰아낸 상황이었다. 이에 1010년 거란 6대 황제 야율융서는 강조의 변, 현종의 즉위를 거란 침략의 빌미로 삼아 그해 11월 거란 황제가 직접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공이었다. 거란 2차 침공 이유 거란은 건국 초부터 권력싸움, 갈등이 황제가 죽을때 마다 빈번했다. 고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던 해 거란에서는 성종 모친 승천태후가 사망했다. 거란의 성종은 12세에 즉위하고 어린 황제 대신 어머니 승천태후가 섭정만 27년을 했던 것이다. 승천태후가 사망했으니 어머니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성종은 자신의 권위를 .. 더보기
천추태후 이야기 고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딸, 5대 경종의 후비, 6대 성종의 여동생이며 7대 목종의 어머니, 8대 현종의 이모가 된다. 고려시대 5,6,7,8 대 왕이 천추태후라는 인물을 거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고려 초기 12년간 섭정을 했고 외척과 간통해 악날한 왕으로 그려져 있다. 천추태후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사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려사는 조선 전기 유학자들의 성리학적 관점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천추태후라 불린 이유천추태후가 거쳐했던 곳이 천추궁이였다. 아들 목종이 즉위하고 자신이 기거하던 수강궁 한켠에 어머니만을 위한 독채 천추궁을 만들어줬다. 천추는 천년의 가을이란 뜻으로 만수무강의 의미 아주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추궁에 있는 태후라는 뜻에서 천추태후라고 부른.. 더보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해산 과정: 한성감옥 사진 속 20대 청년 이승만 모습 한성감옥 죄수들은 누구? 사진 속 이승만 대통령은 젊은 시절 독립협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1899년 고종폐위음모에 가담한 죄로 역모죄로 무기징역 선고 후 쇠사를로 결박까지 당하면 한성감옥에 들어갔다. 이상재 선생은 황성기독교 청년회, 국내에서 YMCA 운동을 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고 그의 아들이 이승인씨로 사진 위에 있는 인물이다. 이들이 찍은 사진의 장소는 구한말에 세워진 서대문형무소 이전의 한성감옥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성감옥 역사 한성감옥은 조선에서 법무부 역할을 했던 기관으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형조 관할의 전옥서 (감옥의 역할을 한 구치소같은 곳) 같은 곳으로 1894년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각종 기관을 근대적으로 개혁하면서 예전에 포도청이었던 곳을 경무청으로 바꾸고 경무청 산하의 감옥서.. 더보기
무주 나제통문의 비밀 전라북도 무주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의 접경지로 군 전체가 소백산맥에 속한다. 골짜기는 깊고 산세는 험준하다. 무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구천동 계곡이다 제 1경 나제통문의 비밀 이 아름다운 무주 구천동은 삼국시대에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무주 구천동 33경의 시작점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석모산이 있는데 1500년 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석모산을 경계로 말투와 생활이 다른 주민들이 살고 있다. 석모산 나제통문을 통해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 왕래를 했다고 한다. 이 경계에 세워진 나제통문을 역사적 통로라 믿었다. 이 일대는 신라와 백제가 영토 확장을 위해 맞붙었던 곳으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 영토확장을 위한 두 나라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던 곳이다. 나제통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