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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만부교 낙타 사건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10세기 초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던 시기 한반도 서북쪽 시라무렌강 일대에 유목민들의 나라 거란이 세워진다. 훗날 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다. 약 8년간 고려와 발해는 공존했던 시기가 존재한다. 만부교 낙타 사건 942년 거란이 고려와 화친을 맺기 위해 사신 30명과 낙타 50마리를 고려에 보낸다. 왕건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하여 이웃으로 삼을수 없다고 했다. 이에 왕건은 거란 사신 30명을 유배 보내고 낙타 500마리를 만부교에 묶어 굵겨 죽인다. 만부교는 일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여 만든 다리로 개경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반드시 거쳐야 했던 다리이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다리 밑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간 낙타 50마리였다... 더보기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떻게 확산이 되었나? 131 -1 유럽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계기는 영국에 의해서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전 세계 인구의 1/4 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영향을 받아 인도, 아프리카등 여러 나라에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파되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시절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장식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부근 앨버트 경은 독일 출신이었다. 이 앨버트 공이 독일의 트리 문화를 영국 왕실에 가져온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1517년 마틴루터가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마틴 루터가 밤에 전나무를 보는데 전나무에 별이 걸려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이에 전나무를 집에 가져와 장식물을 걸어줬다고 한다. 이후 1840년경 .. 더보기
동양척식 주식회사 : 목포 근대역사관 2관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우고 제국주의 침략을 민영화한 것이다 .정부나 왕실 소유의 농토, 숲, 산지 등이 조선총독부 소유로 넘어가고 이것을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겨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살수 있게 했다. 일종의 부동산회사였다. 처음에는 농지부터 시작했던 수탈이 점차 광산, 금융까지 확대되어 갔다. 중일전쟁이후 전쟁 물자가 필요해진 일본은 놋그릇, 제기 등 쇠붙이를 모두 공출해간다. 모든 것을 공출당해서 밥그릇이 없게 되자 일본에서 사기로 만든 밥그릇에 결전, 보은 등의 글자를 적어 일본 왕의 하사품이라고 준 밥그릇이다. 그러나 일본은 밥그릇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밥그릇이고 크기가 작아 들고 먹는데 우리나라는 고봉밥이다. 더보기
제주 출륙금지령 억압의 땅 역사.. : 제주목_관아 , 관덕정 제주목_관아 옛날 제주도는 탐라국이라고 해서 원래 독립된 문명으로 존재했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3성의 시조가 나타나 생긴 나라라는 설화가 있다. 통일신라때부터 문화적 교섭이 시작되었고 신라가 탐라를 끌어들이려고 탐라 우두머리에게 성주, 왕자 등의 작위도 주었다. 고려 중기때부터 고려의 행정체계에 탐라가 편입이 되었다. 제주에 지방관을 고려 중앙 정부가 파견하고 제주목이 된 후, 조선 시대까지 유지 되었다. 그래서 제주목 관아는 역사적인 제주 행정의 중심지로 제주목 관아의 옛날 이름은 성주청이었다. 목 관아 앞에 있는 정자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관아 건물로 1448년 제주 목사 신숙청이 창건 현재 보물 제 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 관덕정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을 .. 더보기
유교란 무엇인가? 삼강행실도 내용 87 -1 오늘날까지도 명절이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유교로 부터 시작된다.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유교이고 현재까지 많은 유교 관습이 남아있다.  유교란 무엇인가?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공자가 체계화하고 설파한 사상을 유교라 불렀다. 원래 공자의 사상은 학문으로 유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종교적 의미를 내포한 유교라는 단어를 쓰기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유교는 학문인 유학에서 시작된 것이다.    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계속된 전쟁으로 극도의 혼란 상태였다.  백성들은 고통받고 도덕과 정치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때 공자가 인간답게 살려면 각자의 본분과 질서를 지켜야 .. 더보기
공산 전투 이야기 : 대구에 남아있는 왕건의 흔적들.. 경애왕의 최후 후백제 견훤의 목표는 삼한통일이었다. 그리고 마침 927년 신라 서라벌을 점령한다. 견훤 군의 공격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애왕은 견훤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모욕하고 경멸했고 결국 경애왕을 자신의 앞에서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 준 것이다. 견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이렇게 해석된다. 견훤은 신라의 장수 출신이다. 그래서 대의명분과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라왕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함도 포함된다. 공산전투 한편 견훤의 서라벌 점령 소식에 고려 왕건은 신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신라고 진격한다. 왕건은 마음이 급해졌고 정예 기병 5000을 이끌고 신라로 향했다. 왕건은 쉬지 않고 .. 더보기
포석정 : 경애왕은 적이 쳐들어오는 때 정말 유상곡수연을 즐기고 있었나? 포석정의 그날 포석정에 대한 이야기로 후삼국 시대 신라 경애왕은 적이 들어오는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신라가 망한 결정적 장면으로 많이 회자가 되고 있다. 후삼국시대 중심은 서라벌 경주였다. 후백제 견원은 신라의 중심부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11월에 견원은 신라의 왕경에 침입하였다.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왔을때 부인과 궁녀를 데리고 포석정에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포석정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기고 있었다. 술잔이 물 위에 띄워서 수로를 따라 떠내려 오던 술잔이 멈추면 술을 먹는데 술잔이 올때 까지 시를 지어야 하고 만약 도달할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3잔을 마셔야 했다. 그렇다면 경애왕은 정말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겼을까? 포석정은 무엇.. 더보기
1910~ 40년 의병 활동 간략 정리 ▶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순종이 이를 받아 들여 이완용이 위임장을 받아들고 남산 통감관저에서 강제 병합에 도장을 찍는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부터 의병이 전국적으로 발발하였고 1907년 정미 7조약 =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된다. 이를 받아들일수 없었던 이들이 의병이 되어 정미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일본은 잔혹하게 진압을 한다. ▶1909년 국내 의병 세력 완전 진압을 위해 남한대토벌작전을 실시한다. 그로 인해 국내 근거지를 상실하게 된 의병세력은 간도, 연해주로 이동한다. 이후 국외에서도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암살한 .. 더보기
독립문 건립 배경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독립문 건립 배경 1896년 세워진 독립문은 19세기 조공, 책봉 관계였던 조선과 청나라 시대인데 1636년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신하의 나라가 된다. 1882년 임오군란등을 거치면서 내정 간섭을 강화했던 청나라였으나 청일전쟁을 청나라가 패하자 1895년 청의 내정간섭에서 조선이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의 독립을 축하하는 기념문을 세우려고 했고 이왕이면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옆자리에 독립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독립문의 독립의 의미는 일본이 아닌 청나라를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 강화를 위해 독립문을 이용한다. 독립문과 일본의 관계 독립문은 일제 강점기때.. 더보기
딜쿠샤: 앨버트 테일러 3.1 운동 전세계 알리다. 딜쿠샤 앨버트 테일러 딜쿠샤에 산 앨버트 테일러는 금광 사업가 겸 뉴스 통신사의 통신원이었다. 그는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 아마 앨버트 테일러가 아니었다면 전 세계에서 주목도 안 했을지 모른다. 앨버트 테일러는 이 은행나무를 보고 집터를 이곳에 잡았다고 한다. 이곳은 권율 장군의 집터이기도 하다. 이 은행나무를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3.1 운동 기사는 전달 배경 고종의 국장 행렬을 사진에 담아 전세계에 타전하게 된다. 그가 찍은 사진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이를 취재하고 사진으로 남겨 숨겨져 있던 조선의 상황을 세상에 알린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앨버트 테일러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게 된다. 1919년 2월 28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