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썸네일형 리스트형 붉은 악마 , 귀면와에 그려진 모습은 무엇? 염제 신농과 황제의 싸움 우리의 붉은 악마의 모습과 신라 시대 기와 속 귀신의 모습을 한 것을 많이 새겨 넣었는데 이는 동양의 신화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동양의 남신 중에 염제 신농이라는 농업의 신이자 불의 신, 의약의 신이 있는데 인간에게 약초를 알려주기 위해 직접 모든 풀을 먹어보고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신이다. 고구려 벽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염제 신농이다. 또 다른 강력한 신, 황제라는 신이 있었다. 임금 황제와는 한자가 다르다. 황제는 용의 반인반수 물의 신으로 염제 신농을 몰아내고 최고의 신 자리에 등극한다. 황제가 최고의 신으로 등극한 것은 백택이라는 동물 덕분이었다. 이 백택은 이 세상의 모든 귀신과 요괴들을 통달하고 있었고 황제의 부하로써 황제를 최고의 신으로 등극하도록 돕는다. 불.. 더보기 추사 김정희 별장: 백석동천 폐허가 된 별서의 정취... 백석동천은 추사 김정희의 별서로 언제 지어졌는지 알지못하지만 1930년대까지 별장으로 운영되던 곳이다. 그 후 한국 전쟁 이후 잊혀지기 시작했고 이후에 다시 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다가 2006년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백석동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탄핵 심판 기간동안 청와대 안에만 머물러 있던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청와대 경호 구역을 산책하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이때 문화재청장을 불러 이곳을 조사하게 했고 알고보니 추사 김정희의 별서로 밝혀진 것이다. 더보기 흥선대원군 별서 석파정 흥선대원군(1820-1898) 의 호는 석파로 돌석, 언덕 파 돌 언덕이라 는 뜻의 석파정은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 (=별서)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서 그림을 가까이 했던 곳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흥선대원군 난초 그림의 스승으로 흥선대원군이 되기 전에 그림을 좋아하던 이하응이 추사에게 난초를 배웠다. 소수운련암 물로 둥지를 틀고 구름으로 발을 삼은 암자라는 뜻으로 석파정을 짓기전 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바위에 새긴 글귀는 옛날부터 이곳이 아름다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적표현이다. 원래 석파정의 주인은 철종때 세도가 안동김씨 김흥근이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이 집 빼어난 풍광에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수차례 김흥근의 별서를 매매 제안을 했으나 이를.. 더보기 창덕궁 후원 이야기 (부용지, 연경당, 신선원전 일대) 부용지 일대처음 이곳은 그냥 언덕이었다. 그러나 15세기에 세조가 4개의 샘물을 찾아 연못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이 을 만들었다. 창덕궁 후원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정자가 무려 17개가 있고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정조가 부용정을 지은 이후 규장각을 설립 몇 대에 걸쳐 완성된 부용지이다. 부용정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부용은 연꽃을 의미하는데 연꽃처럼 연못에서 피어오른 듯한 정자라는 의미가 있다. 부용정은 연못에서 솟은 교각에 앞으로 정자가 튀어나온 모양인데 이 난간에 걸터앉으면 마치 배를 탄 듯한 느낌이다. 영화당 영화당은 왕과 신하의 연회장이며 과거 시험 응시자들이 마지막으로 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던 장소이다. 부용정에서 내려가면 4개의 정자가 .. 더보기 창경궁 이야기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이라고 불렀다. 왕이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있을 곳이 필요했고 상왕과 왕대비가 머물 궁궐이 필요해서 지은 곳이 창경궁이다. 그래서 아담한 규모와 자연지형에 맞춘 편안한 구조의 궁이다. 이곳에서는 또한 왕비 후궁들이 많이 살았다. 여기서 태어난 왕자 중에 왕이 된 사람이 많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은 조화를 넓힌다는 뜻으로 영조가 이 문 앞에서 백성들과 대화를 나눴다. 또한 창경궁의 문정전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장소이다. ▼창경궁 속 사도세자의 죽음 (영화 사도의 임오화변 이야기) 창경궁 속 사도세자의 죽음 (영화 사도의 임오화변 이야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5,36회] 오늘의 탐사지: 창경궁 (춘당지-경춘천-문정전) 주제: 창경궁 속 사도세자 이야기 출연자:.. 더보기 세종의 어린시절 및 즉위식. 세종의 어린시절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으로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이들 충녕대군이다. 첫째는 양녕대군으로 양녕대군 또한 똑똑했으나 하필 동생이 충녕대군(세종)이 다방면으로 천재성을 보인 충녕을 보고 넘을 수 없다는 걸 느꼈던 걸까? 첫째 양녕대군은 충녕에 대해 ' 충녕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라고 여동생에게 가서 충녕의 비범함과 양녕의 심정을 담은 기록도 있다. 양녕대군이 방탕해진 이유가 충녕대군(=세종)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날 태종이 하는 말을 들은 후 우연히 아버지 태종의 속마음을 알게 된 양녕이 일부러 방탕하게 굴었다는 야사도 있다. 양녕대군은 그후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선을 넘어 양녕대군이 사랑한 기생 어리를 간통하고 납치한 얘기를 세종이 고자질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국 초기 나라를 .. 더보기 묘효, 시호란? 세종대왕의 이름은 '이호' 로 그 당시 왕의 이름에 쓰인 한자는 백성들이 사용할수 없기 때문에 왕의 이름엔 어려운 한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묘호란? 죽은 이의 영혼이 위패(신주) 안에 깃든다고 생각하고 그 위패를 모셔둔 단지(=상자)를 신주단지라고 하고 신주를 놓던 그 자리가 신위, 그 신위에 붙이는 이름이 묘호로 그것이 바로 '세종' 이었다. 시호란? 시호는 그 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이름으로 세종의 시호는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 영문:문에 뛰어나시고 예무: 무예도 뛰어나시고 인성: 성품이 인자하시고 명효: 명석한 두뇌와 효도, 효성스럽다. 더보기 한국 최초 서울전차 역사,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 한국 최초 전차 우리나라 전차는 70년간 운행이 되었는데 사실 서울에 남아있는 전차의 흔적은 전차 363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서 있는 381호 단 두 대뿐이다. 그런데 얼마전 이것의 흔적이 얼마전 발견되었다. 1899년 5월 4일 3시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되었다. 이것은 일본 교토에 이어 아시아 두 번째로 개통된 것으로 사람들은 이 전차를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동대문 안쪽에 차고지와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가 위치해 있었다. 전차가 도입되기 전 고종은 매번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명성황후의 묘, 홍릉을 행차하곤 했는데 당시 한성전기회사를 위탁 운영하던 미국인 콜브란 (H. Collbran) 이 이를 보고 전차를 도입하면 행차비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수익도 올릴 수 있다고 .. 더보기 거북선 구조 및 판옥선, 거북선 비교 거북선의 구조 거북선 용 머리가 있는 이유 가설 1: 화포를 넣어 발사했을 것이다.라는 가설이 있다. 가설 2: 나무로 된 배로 해전을 치루던 시기에 중요했던 무기는 상대방 배의 선수에 충돌하는 청동으로 된 무기였다. (충파 전법) 거북선 앞 용머리가 금속으로 만들어 충파 전술에 활용됐을 것이다. 거북선의 용머리에서 현자총통(대포)를 발사해야 하는데 ㄱ자 구조라면 대포 발사가 불가능하여 실제 용머리 형태는 일(ㅡ)자로 박힌 모양 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거북선 덮개는 철로 만들었다? 덮개의 재질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철이 아니다: 당시 기술로는 역부족 #철이다:철이 아니면 설명 불가능한 내구성 이 부분은 알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공포심을 심어준 것을 확실하다. 왜적.. 더보기 조선총독부 폭파 이유: 김영삼 대통령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 김영삼 대통령(임기: 1993~1998.2월)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민주화 이후 첫 문민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부패 척결과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등 중요한 시기를 거쳤다. 역사바로세우기 프로젝트는 김영삼 대통령이 추진한 중요한 개혁 정책 중 하나로 주요 목표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왜곡되거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역사적 진실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중에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10년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의 한국 통치 본부였던 건물로 서울 경복궁 앞에 위치해 있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국이 독립한 후에도 이 건물은 미군정 사령부- 중앙청- 국.. 더보기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