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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보구녀관 : 로제타 홀이 세운 최초의.. 보구녀관 보구녀관은 최초의 여성 전문 의료 교육기관이다. 초기의 보구녀관은 정동에 위치했었으나 이화의료원이 생길때 133년 만에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1886년에 세워진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여사님이 이화학당을 만들고 조선의 의료기관을 다녀보니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남자 의사에게 여자가 진료를 받기 어려웠던 여성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고 여성만을 위한 의료기관을 1887년에 설립했다. 로제다 홀은 누구? 1890년 처음 조선으로 온 로제타 홀의 당시 나이는 25세였다. 이후 43년 동안 한국에서 의료봉사를 펼쳤다. 평양에서 활동에서 평양의 오마니라 불렸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을 정도로 조선을 사랑했다. 로제타 홀은 1865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서 공부했고 그녀에게 영향.. 더보기
박수근 대표작들: 빨래터 , 나무와 두 여인 읽기 박수근 화백 빨래터 박수근 화백의 단골 그림소개 중 하나가 빨래터이다. 그 시절은 근처의 개울에 모여 빨래하던 시절로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소박한 군상을 그리기에 최적화된 장소이다. 박수근의 빨래터 배경 작품은 대부분 1950년 이후의 작품들이다. 박수근 화백 러브스토리 빨래터는 박수근 화백이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빨래터에 있는 어머니에게 점심을 드리러 가던 중 빨래하던 소녀 김복순과 마주했고 첫 눈에 반해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박수근 화백의 아버지가 재혼을 하셔서 춘천에서 금성으로 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윗집에 김복순이 살았고 부유한 가정이었다. 반면에 박수근은 비교적 가난했던 아랫집 청년이었다. 이에 김복순의 아버지는 이 둘.. 더보기
9차 개헌의 역사 : 국회 박물관 투어 국회 투어 : 대한민국 탄생 배경과 1차, 2차 개헌까지 3, 4차 개헌 3, 4차 개헌은 1960년 3.15 부정 선거와 4.19 혁명에 대해 이야기 해야한다. 1960년 제 4대 대통령, 제 5대 부통령 선거 당일날 전국적인 부정선거가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반발로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당시 시위에서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 시위를 기폭제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4.19 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4.19 혁명 배경과 전개 과정 속 김주열 열사의 죽음 4.19 전개 간략 정리 ① 3.15 부정 선거 ② 3.15 의거 ③ 김주열 의사 죽음 ④ 4.18일 고려대생 피습 사건 ⑤ 4.19 혁명 ⑥ 계엄령 선포 ⑦ 4.25 교수단 시위 ⑧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더보기
국회의사당 투어 : 대한민국 탄생 배경과 1차, 2차 개헌까지 국회의사당은 개방된 장소로 국회 1975년에 건립되었고 건립 100주년 2075년에 개봉할 목적으로 포도주를 묻어놨다고 한다. 국회에는 국회의원 300명이 있다.    국회의 역할 가장 큰 역할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헌법개정 권한이 있다. 또한 예산안 심의와 결산을 하는데 1년에 660조 원 예산을 사용하는데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약 2조원씩 심사하며 국민들의 살림을 검토한다.    국회의 시초 임시의정원 일제의 지배에 항거한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로부터 한달 후 상해에 독립운동 대표자 29인이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만든다. 이것이 국회의 시초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국호 대한민국을 정하고 헌법을 만들며 입법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29명의 임시의정원 의원이 1919.. 더보기
3선 개헌 통과 배경~ 김영삼, 김대중을 통해 본 한국 현대 정치사 흐름읽기 1967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3선 개헌에 대한 불씨가 일기 시작했다. 김종필은 자신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날벼락 같은 3선 개헌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박정희은 2인자의 배신에 화가 났고 JP 지지자들은 공화당에서 이미 제거 대상이었다. 박정희는 김종필을 회유했고 자신의 지지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김종필은 박정희의 국무총리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그러나 허울뿐인 권력에 불과했고 김종필은 이렇게 만연 2인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JP의 합류로 3선 개헌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김영삼 초산 테러 이에 김대중은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했고 김영삼 또한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했다. 이런 중 김영삼 자택 앞에서 초산 테러가 발생한다. 여당은 결국 야당을 따돌리고 투표장.. 더보기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어떻게 정치에 등장했나? 한국의 현대사는 1950년~2000년대 3김 시대로 한국 정치사의 중심에는 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있었다. 김영삼 : 민주당의 뿌리 김영삼은 만 25세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등장한다. 이후 무려 9선에 성공한다. 1952년 1차 개헌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택산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다. 젊고 잘생겼는데 금수저이기까지했다. 김영삼은 이승만이 속해 있는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는데 이승만이 장기 집권 계획을 위해 개헌을 또 하겠다고 하니 직접 개헌 반대를 외치게 된다. 그러나 결국 2차 개헌이 의결되자 탈당을 결심한다. 그때가 당시 개헌에 반대한 범야당 연합 '호헌동지회' 가 생기고 김영삼은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민주당의 뿌리가 된다. 김종필 제일 논란인 문제는... 5.16 군사정변부터 제.. 더보기
순조 (정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아버지) : 세도 정치의 시작 세조 정치의 기원은 정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위태로운 세자시절을 보낸 정조는 후견그룹의 지원을 뼈져리게 느끼며 왕이 되었고 정조는 죽기 보름전 김조순을 불러 순조의 뒤를 봐줄것을 부탁한다.  정조 사망당시 1800년 순조의 나이는 11세였다. 정조의 반대파였던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대신 수렴청정을 하며 순조의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정조의 유시를 받은 김조순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순조 1년 1801년 수렴청정했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노론의 정적인 남인(정조지지세력) 등 5백여명을 숙청한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정순왕후가 물러난 이후에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 중심에 안동 김씨가 국정을 장악하게 된다. 국왕의 인사권도 유명무실해졌다.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외척들은 삼망에 모두 자신의 세력을.. 더보기
효명세자 개혁정치 : 실제모습은?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정조가 일찍 사망하면서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이때는 세도정권이 만들어지던 혼란한 시기였고 정조가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 순조의 외척 세력 안동김씨 김조순에게 아들 순조를 부탁한다.    적장자 효명세자 그리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명분으로 김조순은 자신의 딸을 순조와 결혼시켰고 외척으로서 안동 김씨 세력을 확장했다. 그렇게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의 집권내내 권력을 휘둘렸던 안동 김씨 세력에 힘을 쓰지 못했던 순조였다. 그런 순조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효명세자이다. 효명세자는 적장자(정식왕비가 낳은 아들) 로 태어났기 때문에 굉장히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숙종 이후로 150년 만의 적장자였다.   효명세자의 실제 외모 .. 더보기
공민왕 개혁정치 그리고 죽음까지 공민왕은 왕이 되자 즉위교서를 발표한다. 교서에는 일국갱시 : 한나라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즉위교서 발표와 함께 개혁을 시작한다. 공민왕은 몽골의 풍습이던 변발을 풀어헤치고 호복도 벗으며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전 분야를 아울러 개혁을 펼쳤다.    조일신의 난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에 기황후의 거센 반발이 있었고 이걸 보던 공민왕의 최측근 조일신이 기황후의 일족 중 기황후의 오빠인 기원을 제거했다. 공민왕의 개혁을 위해 조일신이 벌인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로인해 기황후에게 위협을 느끼고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를 했고 조일신을 죽인다. 그렇게 기황후에게 충성을 보이며 한보 물어났다.  1351년 5월 18일 개혁 3가지당시 기황후와 더불어 기철, .. 더보기
공민왕 신당이 종묘에 있는 이유? 고려 31대 공민왕은 고려사에 중요한 왕 중에 한사람으로 종묘에 고려왕 중 유일하게 자리한 공민왕 사당이 있고 역사상 가장 큰 영토였던 몽골제국이 붕괴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려 500년 왕조의 마지막 불꽃 같았던 왕이다.  공민왕 어떻게 왕이 되었나? 13세기 고려는 30여 년간 대몽항쟁을 이어왔고 고려의 패배 후 원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대대로 원의 황실과 혼인하여 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였다. 공민왕 역시 원나라 노국대장공주와 혼인을 맺게 된다. 또한 공녀라는 이름으로 젊은 여성들이 원에 조공으로 바쳐졌다. 이때 공녀로 갔던 기씨가 황후가 되었고 이후 고려에 관한 일은 기황후가 했었다. 이때 고려는 일본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고 1351년부터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 동해안까지 침략을 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