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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Blue House 투어 :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 2022년 대중에게 전면 개방된 청와대 뒤로 높이 342m 의 북악산이 위치해 있다. 사람의 얼굴을 닮아 면악 또는 백악산이라고 불린다. 큰 바위 두개가 용의 눈으로 옛날부터 전해지기로 청와대, 경복궁 터가 북악산용의 기운에 딱 맞는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청와대 본관의 푸른 기와는 15만장을 얹은 것이다.  이 푸른 기와는 기와를 굽고 유약을 발라서 1000 도씨가 넘는 고온에서 다시 구워야 한다.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는 130년전 전봉준의 동학농민 운동 실패 후 뿔뿔이 흩어진 동학군의 일부가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새로운 민족 종교 보천교를 창설했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화하던 조선총독부가 일본 종교 신도,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남겨놓고 이 민족 종교들을.. 더보기
한강 다리 폭파 사건 (이승만 대통령 제일먼저 도망, 부역자 처벌? ) 이승만 대통령 도망 한국 전쟁은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후, 북한군이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창덕궁 비원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 국회의 결의 없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서울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황규명 비서만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대전을 거쳐 대구로 이미 가있었다. 이들은 특별 열차를 이용했는데 담요조차 제대로 덮지 못하고, 급하게 트렁크를 들고 급박하게 떠났던 것이다.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게 잡히거나 납북되는 상황이 발.. 더보기
완도 고금도 묘당도 속 충무사 이순신 유해가 잠들었던 곳.. 묘당도 전남 고금도에는 묘당도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다. 원래는 섬이였으나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와 하나가 되었다. 충무사 1597년 7월 명나라 원군, 해군이 도착한다. 진린이 이끄는 5천여 군사들이 고금도에 진을 쳤다. 이후 명나라 해군과 연합작전을 펼친다. 그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던 곳에 충무사가 있다. 충무사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던 관왕묘가 있던 자리로 전쟁 후에 이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이 관왕묘비를 세운 사람은 명나라 해군 사령관 진린이다. 월송대 이순신이 마지막 노량해전을 치른 후 전사하고 임진왜란도 끝이 난다. 이순신의 유해는 이곳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는 고금도에 임시로 안장된다. 지금도 이순신의 초분지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그의 고향이자 선영이 있.. 더보기
흥남철수작전 : 메러디스 호의 기적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크리스마스 전에 끝날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고 강원도 쪽으로 올라가던 부대의 경우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흥남 항구를 통한 철수 작전을 계획한다. 함흥과 흥남 일대를 제외하고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항구에서 배로 도망갈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몇 개 부대는 희생을 하게 된다. 흥남 철수 작전을 위해 장진 일대에서 미국 제 해병1사단과 중공군간의 전투가 벌어진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6.25 전쟁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군 참전이다.  6.25 전쟁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바로 중국군 개입때이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 더보기
중국군 인해전술 전략 알아보기: 마오쩌둥 아들 한국전쟁 참전 사망하다. !! 한국전쟁을 중국정부 공식명칭은 항미원조 전쟁이다.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중국 혁명을 완성했다. 내부 반혁명,반당 분자를 숙청 토지혁명을 완성으로 농민지지를 획득했다. 항미 원조 전쟁 선전,선동으로 중국이 총단결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마오안잉 6.25 참전 사망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마오쩌둥의 장남을 한국전쟁에 참전시켰던 것이다. 이때 마오안잉의 나이가 29세로 신혼 1년차였다. 그러나 참전 1달만에 소이탄에 맞아 죽게된다. 마오쩌둥은 이 소식을 두달 뒤에 접하게 되었고 마오쩌둥이 극대노할거 같았으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중국인의 의리의 표본이다. 아들의 시신을 조선 반도에 그냥 두라" 현재 마오쩌둥 아들의 시신은 북한에 그대로 묻혀있다. 중국의 고위특사가 오거나 .. 더보기
송악산 292 전투 : 한국전쟁 전 상황 1949년 38선 상황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부터 38선 근처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19491월 ~10월 38선 충돌 통계를 보면 북한군 출연 횟수는 563회, 북한군 병력은 70,625명, 한국군 병력은 46,073명이었다. 또한 사망자는 4천명이 넘었고 한국군도 320명, 부상 800 , 민간인 사상자도 200명 가까이 되었다. 1949년 내내 38선에서 끊이지 않고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매일 1.5 건의 충돌과 매일 3.7 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38선에서 대립을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는 3년째 중국 국공내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 1949년 4월 24일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의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미국이 지원한 국민당이 불리해지면 미국.. 더보기
용산 미군 기지 투어 드래곤 힐 호텔 서울 시내 한복판에 미군 기지가 있었다. 용산 기지의 면적은 여의도의 절반 규모로 축구경기장 200개 크기의 기지였다. 그러나 지도에서 확인하면 용산 미군 기지는 표시 되지 않았다. 반환된 용산 기지가 개방되었다. 아래 하얀 건물은 미군이 이곳의 주인이 되기 전 일본군 초소였다. 현재 드레곤 힐 호텔 자리는 일본 조선군 사령관 관저가 있었던 자리에 호텔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군 초소와 돌기둥이 아직 남아있다. 용산기지 안에는 곳곳에 문인석과 동자상들이 남아있다. 이것은 무덤을 지키던 석상들인데 옛날에 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증거이다. 사우스포스트 용산 미군기지는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로 나뉜다. 사우스포스트 벙커 용산 군사시설 중 제일 상징적인 곳으로 일제 시대 일본.. 더보기
부산 제한유엔기념공원 : UN 공원 속 참전국 이야기 유엔기념공원 7월 27일은 UN군 참전의 날로 우리나라에서 지정되어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유엔군의 희생과 봉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50년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로 인해 UN군 사상자가 늘며 유해 안장할 곳이 필요했고 제한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1월 6.25 전쟁 전사자 매장을 위해 UN군 사령부가 조성한 곳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장병들의 유해를 모아 안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일의 UN군 묘역으로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11개국 2327명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휴전 후 1955년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UN군에 영구 기증하기로 결정한다.   UN 묘역이 부산에 조성된 이유는 부산국제영화를 하던.. 더보기
휴전회담 쟁점 포로 송환 무엇이 문제였나? 포로 송환 문제 정전 협상의 최대 쟁점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그 이유는 포로의 숫자에 큰 차이가 있었다. 공산군 측의 유엔군 포로는 약 1만 2천명 정도였고 UN측의 공산군 포로는 약 13만명이었다. 약 10배 차이였다. 그러나 문제는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에 북한군과 중국군만 있으면 문제가 없었으나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이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징용을 당한 남한의 국민들이 북한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 동원된 남한 국민을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로 구성의 차이와 숫자의 차이로 인해 무려 1년 반이나 대립한 포로 송환문제가 계속되었다. 자동 송환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유송환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자동송환: 국적에 따라 당사국으로 바로 송환 *자유송환: .. 더보기
연천 경순왕릉 : 신라의 마지막 왕은 왜 이곳에 묻혔나? 10세기 후반 978년 신라 56대 임금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의 계속된 침공에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내어준다. 그리고 경순왕은 개경에서 눈을 감는다. 경순왕의 관은 조상들이 묻힌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왕실은 왕의 무덤은 수도에서 백리밖에 두지 못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운구를 멈추게 했다. 고려는 신라 유민들의 봉기를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경순왕은 결국 고랑포 신라 국경을 눈 앞에서 두고 개경에서 80리 거리 북쪽 언덕에 묻히게 된다. 경주 밖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야산에 버려졌던 경순왕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라진다. 그러다 조선 영조때 1746년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지만 또 다시 잊혀진다. 그러곧 한참 뒤 1970년대 들어서야 총탄 가득한 경순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