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썸네일형 리스트형 감은사지 이야기 - 사리함에 무엇이? 경주에 가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릉이 바다 속에 있다. 문무왕이 죽으면서 왜구의 침략을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겠으니 대왕암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문무왕 때 불교의 영향을 받아 윤회사상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동해의 용왕이된 문무왕의 기운을 아직까지도 받기 위해 문무대왕릉 앞에 가면 무속인들의 꽹과리 소리, 굿하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윤회사상 : 이생에서 어떤 업을 쌓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이 또 열린다는 불교의 중요한 사상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수중릉을 마련하였고 인근데 감은사를 세워 아버지의 뜻을 기렸다. 감은사지 위치, 금당터 의미 경주의 대부분의 절은 경주의 안쪽에 위치해 있으나 이곳 감은사지 터는 문무왕 근처 경주 외곽 동해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 더보기 배달의 민족 의미 / 단군신화 해석하기 배달민족의 어원 우리민족은 어떤 민족인가라고 물으면 배달의 민족이라고 대답한다. '배달'의 어원은 단군 신화에서 나온다. 단군에 대한 기록은 두 군대인데 고려시대 일연이 쓴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 이승휴라는 유학자가 쓴 제왕운기이다. 제왕운기의 기록은 환웅이 손녀에게 사람되는 약을 먹여 사람이 된 환웅의 손녀는 박달나무신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에는 '고조선조 ' 우리나라 첫번째 국가 고조선을 세운 단군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세상으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하는 이야기이다. 신화의 내용 중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는 부분이 있다. 이때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으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아라 ' 하니 곰만이 인간 (웅녀)이 되.. 더보기 전남 보성 벌교 여행 : 소설 태백산맥 배경 장소들 어디? 태백산맥 문학관 예전에 벌교에가서 주먹자랑으로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유는 과거 벌교는 조그만 갯마을이었는데 일제때 전남 송정리와 삼낭진을 연결하는 경전선 철도가 연결이 되면서 벌교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많은 돈이 몰렸기 때문이다. 벌교는 아주 중요한 항구도시로 한국의 좌우 갈등과 남북 대결의 현장이자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배경지이다. 그래서 벌교 여행할때 소설 속 공간들을 따라 여행할 수 있는 코스가 잘 발달되었다. 소설 태백산맥이란? 태백산맥이란 용어는 일본 학자에 따른 것으로 현재는 선조들의 개념 따라 '백두대간' 을 사용한다. 소설 태백산맥은 문학 평론가 48인이 뽑은 80년대 최고의 문제작 1위, 현역작가와 평론가 50인이 뽑은 한국의 최고 소설이다. 80년대 .. 더보기 벌교 보성여관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지) 벌교 보성여관은 2008년에 복원해 숙소, 카페,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고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제 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람료 1000원이다. 소설 태백산맥 속 빨치산 토벌대가 머물던 곳 남도여관으로 나오는 곳이 바로 '보성여관' 이다. 보성여관은 1935년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의 수출입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묵고 가는 여관으로 문을 열었다. 벌교읍 한구석에 위치한 일식가옥으로 보성여관은 소설 의 배경지였고 1935년 개관해 실제 여관으로 사용된 곳이다. 시민, 기업의 후원으로 복원사업을 거쳐 현재 숙박 및 다목적 문화체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제강점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벌교는 일본인들의 왕래가 많았고 보성여관은 지금의 5성급 호텔의 위상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윤보선, 김대중.. 더보기 여순사건 원인, 배경, 토벌작전: 부역자 색출방법 여순 사건이란? 광복 이후 정부 수립관련해 통일 정부 수립과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의견이 충돌한다. 그러던 중 1948년 제주도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 세력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이 사건이 제주 4.3 사건이다. 이에 정부는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에게 하달한다. 그러나 당시 14연대의 군인들 중 일부 세력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했고 1948년 10월 19일 , 전라남도 여수-순천에서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명령 불복종이자 내란이었다. 무장한 14연대의 군인들은 여수와 순천을 순식간에 장악했고 이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이어졌는데 정부는 이 소식에 계엄령을 발효하고 대규.. 더보기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 일본의 치밀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운요호 사건신미양요 4년 후 1875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해안 측정을 핑계로 침범한 것이다. 일본군 군함에 딸린 작은 배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했고 예고없는 침투에 조선군은 포격을 가해 경고했다. 이에 일본은 일본 국기를 달았는데 공격했다고 자신의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에 대한 보복을 위해 강화도 옆 영종진을 침략해 조선군과 주민을 학살한다.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통상 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운요호 함장이었던 이노우에 요시카는 자신의 국가에 보고할때는 처음에 국기 게양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신미양요때 미국이 했던 방식과 똑같이 군함을 가지고 와서 강화도 앞바다에서 조선군을 도발하며 포격을 유도한 것이다. 이를 .. 더보기 우씨 왕후 이야기 : 언제까지 권력을 잡았을까?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인.. 드라마 우씨 왕후는 고구려 제 9대 왕 고국천왕과 고구려 10대 왕 산상왕은 형제관계로 두 형제모두 우씨왕후를 아내로 두었다. 우씨왕후는 형제와 결혼을 해서 두 번이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우씨왕후 시대적 배경고구려 초기 비류나부, 연나부, 계루부, 환나부, 관나부 5부족으로 이루어진 5부족 연맹체제였다. 5부의 장(대가, 소가) 들이 모여 고구려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제가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고 고구려 초기 5개 부족을 다스리는 군장의 힘은 왕에 맞먹을 만한 힘이었다. 5개의 부족 국가중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계루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5개 부족 연맹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또한 계루부 출신이다. 주몽 이후로도 고구려 왕 대부분은 계.. 더보기 한일 병합, 한일 합방, 경술국치의 뜻 맞는 용어는 무엇? 일본은 1910년 8월 29일을 '한일병합의 날'로 부른다. 한국이 일제의 일부가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이 지구상에서 폐멸됨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일본은 단어 하나에도 고심했다. '합병`'은 회사끼리 동등하게 합치는 것이라 합병이나 합방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열등한 한국과 등등하게 합친다는 의미가 있는 '합병과 합방'은 배제한 것이다. '병탄'이 맞는 용어였으나 '병탄'이란 의미에는 일본의 침략적 야욕이 너무 드러나는 단어라 배제했다. 대내외적인 시선을 고려해 만든 용어로 고심 끝에 도출해낸 단어가 '병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병합'이란 말을 써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단어를 써야할까? 이 당시는 1910년 경술년이였고 국가가 경술년에 가장 큰 수치를 겪었다는 의미의 .. 더보기 강신무와 세습무의 차이 : 모든 무당은 작두를 탄다 ?! 중부. 이북지방은 무병(신병)을 앓고 무당이 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런 사람을 신이 내렸다고 해서 강신무라고 한다.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지방의 경우는 세습무가 많다. 부모가 무당이면 혈연 승계로 자식도 무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강신 경험이 없다. 그래서 무당이라고 모두 신이 내린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적인 요소들로 미디어에선 강신무의 모습이 대다수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맥 소설의 소화라는 무당이 나오는데 '소화'의 모습은 세습무이다. 반면에 영화 속 김고은(화림 역)은 강신무 역할이었다. 모든 무당이 작두를 탄다는 건 오해이다. 무당은 몸주 즉 무당이 신병을 앓을 때 강신하여 영력의 주체가 되는 신격이 있는데 그 신이 작두장군이나 작두대신이라고 부르는 신을.. 더보기 덕수궁 이야기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때 의주로 몽진한 후 1년 후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모든 궁궐이 불타버려 머무를 곳이 없어지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살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 월산대군의 증손자가 살던 석어당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선조가 살았으나 궁궐로 지어진 것이 아니기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다. 광해군 3년에 창덕궁이 완공되자 왕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이라 명명하게 된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된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되고 황후가 살해당한 경복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들어가 자주 국가 대한제국 설립을 추진한다. 고종은 원구단을 만든 후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대한제국 멸망 후 원구단은 일제에 의.. 더보기 이전 1 2 3 4 5 6 ··· 3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