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은 단순한 종교적 건축물을 넘어, 한국 천주교의 발전사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격동적인 근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상징적인 장소이다. 1898년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1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명동성당이 자리한 현 명동 일대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명례방(明禮坊)'**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 명례방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평신도 주도의 천주교 도입: 한국 천주교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선교사가 아닌 조선 지식인 평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진 종교이다. 이들은 서학(西學) 연구를 통해 천주교를 접했고, 명례방은 바로 이러한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처음 형성된 핵심적인 장소였다.
- 최초의 세례와 순교: 조선 최초의 영세자(세례자)인 이승훈이 바로 이 명례방에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또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중 한 명인 김범우가 살았던 곳도 명례방이었다. 이처럼 명례방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뿌리를 내리려 했던 초기 천주교인들의 아픔과 열정이 서린 성지였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오랫동안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2. 고난 속의 성당 건립 과정
오랜 박해의 시간을 견딘 천주교는 1886년 조프수호통상조약(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후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조선교구장이었던 **블랑 주교(한국명 백규삼)**는 성당 건립을 추진하며 명례방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당 건립은 순탄하지 않았다.
- 왕실과의 갈등: 성당 부지 옆에는 조선 왕들의 어진(초상화)을 모셨던 **영희전(永禧殿)**이 있었다. 성당을 세우면 영희전의 풍수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었고, 특히 성당 건물의 높은 고도가 경복궁 등 왕실 건축물들을 내려다보는 형국이어서 고종의 불쾌감을 샀다. 고종은 이를 왕실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여 부지 소유권을 억류하거나 매입 대금을 반환하며 성당 건립을 방해하려 했다.
- 사회 혼란과 재정난: 겨우 소유권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도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서양식 건축 기술자가 전무하여 중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와야 했으나,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같은 극심한 사회 혼란이 연이어 발생하여 공사가 중단되기 일쑤였다. 재정난 또한 공사를 지연시키는 주된 원인이었다.
- 화재 등 불운: 심지어 완공 직전에는 화재가 발생하는 등 아찔한 상황들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명동성당은 착공 6년 만인 1898년에야 비로소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완공되었다. 당시 백성들은 이 거대한 서양식 건물을 신기하게 여겨 **'뾰족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그림자
명동성당은 완공 후에도 시대의 시련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아쉬운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 선교의 자유와 독립운동 외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프랑스 신부들에게 "선교 사업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정치에 간여하지 말라"는 제안을 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등지에서 식민 지배를 경험했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었기에, 피식민 지배국의 민족 정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결국, 대다수의 프랑스 신부들은 선교의 자유와 성당 확장, 세금 면제 등 여러 특권을 얻는 대신 총독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거나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 안중근 의사 외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순국 직전 고해성사를 보고자 했을 때,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이를 반대했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규정하며 종교적 지원을 거부했고, 안 의사의 순국 후에도 "일본인들이 시신을 유가족에게 넘기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일기에 기록하는 등 친일적인 태도를 보였다.
천주교 흑역사 (토마스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절하다)
천주교 흑역사 (1900~1910) 명동 성당 완공 당시 명동성당 주교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신부로 제 8대 조선 교구장이었던 프랑스 신부였는데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조선에 있었고 이 시기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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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탄압 동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 신학생들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 했으나, 외국인 주교와 신부들은 이들을 '폭도'로 묘사하며 만세 운동 참여 시 처벌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물론 소수의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힘쓰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의 지속을 위해 조선의 민족적 아픔과 독립 염원을 외면했다는 점은 한국 천주교 역사의 안타까운 부분으로 남아있다.
4.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서의 부활
그러나 명동성당은 1970년대 이후, 과거의 오욕을 씻어내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성지로 거듭났다.
- 김수환 추기경의 용기 있는 강론: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직후, 당시 언론 검열이 극심했던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 자정 미사 생중계 중 검열을 무시하고 정부의 독재를 비판하는 강론을 했다. 그는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라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중계 방송은 결국 중단되었지만, 김 추기경의 "잡혀가면 잡혀가는 거지 뭐"라는 말은 그의 용기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이 사건 이후 명동성당 성탄 미사는 17년간 생중계되지 못했다.
명동성당 역사 속 3.1 구국선언 / 정의구현 사제단이 영향받은 해방신학 배경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추모 미사가 진행되었다. 미사복을 입고 명동성당 밖으로 나와 가두시위를 벌인 천주교 사제들은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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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 폭로: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그해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진실을 폭로했다. 이는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8년 2월 24일 전두환 대통령 임기 종료를 앞둔 1987년 12월 16일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통령 임기기 끝난 후 노년을 대비해 자신의 육사 동기이자 친구인 노태우 당시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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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민주항쟁의 최후 보루: 6월 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시위하던 많은 시민들은 경찰의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명동성당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피난처가 되었다. 이곳에서 시위대는 5박 6일간 농성을 벌였고, 명동성당 담벼락을 통해 외부 시민들이 보내주는 빵, 김밥, 돈, 의약품 등의 지원품이 끊임없이 전달되었다. 심지어 인근 개성여고 학생들이 점심 도시락을 모아 전달하는 등 전 국민의 지지와 연대가 이루어졌다.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시작된 6월 민주 항쟁 과정 결과 의의
6월 이전의 상황은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뒤에 전두환이 호헌 조치를 발표한 상태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6월 내내 울려 퍼졌던 "호헌철페,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국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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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의 결단: 정부가 시위대 전원에 대한 구속 방침을 내리고 안기부 차장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 최후 통첩을 전했을 때, 김 추기경은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정부의 강경 진압을 막아냈다.
- 그의 이러한 결단은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88 올림픽을 앞둔 정부가 함부로 공권력을 투입하지 못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180만 명 이상이 참여하며 민주화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정부는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포함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명동성당은 이처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5. 과거사 반성과 화해의 노력
197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는 과거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와 잘못된 판단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 1970년대에는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를 열었고, 1993년에는 안중근 의사 첫 공식 추모 미사를 집전하며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해 연대 책임을 느낀다"고 사과했다.
-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서도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공개 사과를 통해 과거를 직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중요한 신앙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련과 독재에 맞서 싸우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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