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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안중근 의사 집안에서 몇 명이 건국 훈장을 받았을까?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고 하얼빈 의거로 사형을 당하고 생을 마감한 후 안중근을 만나러 오던 아내와 아이들은 끝내 안중근을 만나지 못한다. 조국에 남아있던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이후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도움으로 연해주에 자리를 잡게 된다.   두 명의 안중근 남동생 안정근, 안공근은 마지막까지 안중근의 옥바라지를 했고 안중근이 사망한 이후 안중근 대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던 차남 안정근은 안중근의 죽음 이후 1910년 중국 상해로 향하고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 상해 임시정부의 의원으로 활동했던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북간도 특파원으로 선발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섰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참전한다... 더보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무엇이 문제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인신매매를 묵과하고 있고 한일 양국의 잘못된 합의로 인해 더욱 상처가 깊어졌다.    위안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표현은 일본군 성노예 인데 피해자분들은 성노예라는 표현으로 마음의 상처가 더욱 깊어지기 때문에 보편적인 표현은 일본군 '위안부' 이다.    세계 최초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한 분은 고 김학순 할머니이다. 일본에서도 80년대 부터 '위안부' 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실제로 피해자들이 나왔던 것은 아니였는데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 사실을 알린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 시작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인해 당시 일본군의 잔혹한 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처음 일본군의 위안부의 시작은 난징대학살이었다. .. 더보기
잊혀진 영웅 강우규 의사 : 서울역 앞 동상 그는 무엇을 했나? 강우규 의사는 누구? 의열투쟁의 대표적 인물로 안중근을 떠올린다. 의거 당시 안중근의 나이는 31세였다. 일왕의 생일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당시 나이도 24세였다.  그러나 적지않은 나이 65세의 나이로 의열투쟁을 했던 인물이 있다. 강우규 의사이다.    친일파 양성 사이토 마코토 1910년 한일합병이후 일순간 나라를 잃은 삼천만 조선민중은 비탄에 잠기게 되고 1919년 3.1운동이 평화적으로 전개되지만 일본은 무자비하게 총칼로 민중을 탄압했다.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바꾼다. 1920년대 이 문화통치를 통해 수많은 친일파가 양성되었다. 그 시발점을 만든 인물이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었다. 그는 폭력이 아닌 교묘히 민족분열을 조장해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강우규 의.. 더보기
사후 세계 믿음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무덤이다. 죽은 사람의 집이 무덤이고 그 무덤 속에 무언가를 함께 묻는 것 자체가 사후 세계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000년 전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기 청동으로 만든 비파형 동검 칼이 있다. 무덤을 파보면 동검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칼의 상태가 하나의 온전한 상태의 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칼이 반토막으로 부러진 상태로 발견된다.   이것은 일부러 부러트린 형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칼을 반 토막을 내서 묻었을까를 생각해보면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수 없으나 한가지 추측으로는 동검의 주인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칼을 들고 활약하기 위해 칼도 저승으로 보내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을 부러뜨려 넣.. 더보기
영화 암살 전지현 모티브 인물 : 남자현을 아시나요? 남자현이 독립운동을 한 계기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에서 지내온 인물로 을미사변 당시 남자현의 남편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 당시 임신 중이였는데 남편의 마지막 옷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남자현은 아들을 다 키우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한 후 남편의 복수를 위해 47세의 나이에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만주로 망명 후 독립군 부대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에 아들은 입학을 했다. 이렇게 남자현은 오랜기간 준비를 했고  실제 남자현은 총을 잘 쐇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무관학교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인 .. 더보기
동의회 엄인섭 독립투사에서 밀정으로.. (15만원 탈취 의거 ) 엄인섭은 누구? 엄인섭은 동의회 소속 독립 운동가였다.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항일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였기 때문에 엄인섭의 실체를 최근까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의 기밀자료가 공개되면서 엄인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1911년 부터 엄인섭이 정보를 보고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15만원 탈취 의거 엄인섭이 밀정으로 드러난 결정적인 사건은 간도 15만 원 사건이 있다.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제가 1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을 운송 중이었고 이것을 탈취해 독립군 문기를 구입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탈취와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된다. 이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이 체포가 되서 서대.. 더보기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의회, 권업회 만들다.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이다. 최재형은 재력가이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나 사실  최재형은 아버지는 노비 어머니는 기생인 노비 출신이다. 1860년대 함경북도를 덮친 흉년때 가난과 학정을 피해 수많은 한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을 갔다. 1869년에만 약 6000명의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했고 이에 러시아 정부는 토지를 제공, 세금 면제 등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최재형이었다.    \러시아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익힌 최재형은 이후 배를 타며 선원 생활을 했고 생활기반을 다졌다. 최재형은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생활을 하며 통역과 군수사업으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며 출세의 기반을 다졌다. .. 더보기
북촌 한옥마을 어떻게 탄생했나? 정세권 그는 누구인가? 북촌과 남촌 북촌 한옥마을의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는다. 북촌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부터 쓴 명칭이다.  조선시대 북촌은 현재 가회동, 인사동을 포함 현재보다 더 넓었던 지역으로 왕족과 권세높은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근처에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북촌과 더불어 청계천 남쪽에 남산까지 아우르 지금의 명동, 을지로, 충무로 지역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북촌과 달리 남촌은 권세가 낮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북촌과 남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1880년대 후반부터 유입되어 남촌에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 사건 경술국치가 되고 한양의 이름을 경성으로 바꾼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의 세력이.. 더보기
독도 분쟁 문제 국제사법 재판소 재소해야 할까? 한국의 전략은? 1993년까지는 일본의 독도 문제 주장에 무대응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대응을 할수 없게 되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고 이때 무대응을 하게되면 국제법상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은 독도 땅이라고 반박을 해야 한다. 반박하지 않을 경우 소극적 인정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재판소에 가도 충분한 증거가 있기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일부러 가지 않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독도는 분쟁 지역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독도가 일본 것인지 한국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재판 거부 불가 즉 관할권.. 더보기
한민족 역사 (한민족 기준이란 :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는 우리민족인가?) 한민족 시작점 조선시대 쇄국정책 이전에는 국경이 엄격하지 않아 고려 시대까지는 자유롭게 다른 나라를 이동했다. 동아시아에 쇄국의 질서가 만들어진 건 1800년 도 말이다. 조선은 흥선대원군 시대, 일본은 도쿠카와 시대, 중국도 청나라 시대였다. 이 균형이 꺠진 것이 아편전쟁이었다.   이 아편전쟁은 아시아가 서양 오랑캐에게 너무나 크게 깨졌고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강제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일본 -조선 순으로 강제 개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주민 역사 이때 쇄국정책으로 묶여놨던 조선인들이 만주 땅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만주 땅은 성지로 생각해서 중국인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빈땅으로 놔뒀는데 바로 그 땅으로 조선인들이 이주한다.   만주를 이어 연해주까지 개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