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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이자겸의 난 진실 고려시대 사회 변화 이자겸은 인주 이씨로 혼인관계를 통해 고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외척으로 등극했다. 이자겸은 인주 이씨로 지금의 경기도 인천이 본관을 고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키운 외척 세력이다.   고려 16대 왕 예종의 장인이자 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 그 힘을 업고 왕을 몰아내려고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1126년 고려의 17대 왕 인종이 내시를 불러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을 숙청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인종잉 먼저 이자겸을 제거하려던 것으로 외손자 인종에게 공격받고 이자겸이 방어한 것인데 교과서에는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를때가 14세였다. 그래서 인종을 대신해서 1.. 더보기
붉은 악마 , 귀면와에 그려진 모습은 무엇? 염제 신농과 황제의 싸움 우리의 붉은 악마의 모습과 신라 시대 기와 속 귀신의 모습을 한 것을 많이 새겨 넣었는데 이는 동양의 신화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동양의 남신 중에 염제 신농이라는 농업의 신이자 불의 신, 의약의 신이 있는데 인간에게 약초를 알려주기 위해 직접 모든 풀을 먹어보고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신이다. 고구려 벽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염제 신농이다.   또 다른 강력한 신, 황제라는 신이 있었다. 임금 황제와는 한자가 다르다. 황제는 용의 반인반수 물의 신으로 염제 신농을 몰아내고 최고의 신 자리에 등극한다. 황제가 최고의 신으로 등극한 것은 백택이라는 동물 덕분이었다.  이 백택은 이 세상의 모든 귀신과 요괴들을 통달하고 있었고 황제의 부하로써 황제를 최고의 신으로 등극하도록 돕는다.   불.. 더보기
추사 김정희 별장: 백석동천 폐허가 된 별서의 정취... 백석동천은 추사 김정희의 별서로 언제 지어졌는지 알지못하지만 1930년대까지 별장으로 운영되던 곳이다. 그 후 한국 전쟁 이후 잊혀지기 시작했고 이후에 다시 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다가 2006년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백석동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탄핵 심판 기간동안  청와대 안에만 머물러 있던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청와대 경호 구역을 산책하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이때 문화재청장을 불러 이곳을 조사하게 했고 알고보니 추사 김정희의 별서로 밝혀진 것이다. 더보기
흥선대원군 별서 석파정 흥선대원군(1820-1898) 의 호는 석파로 돌석, 언덕 파 돌 언덕이라 는 뜻의 석파정은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 (=별서)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서 그림을 가까이 했던 곳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흥선대원군 난초 그림의 스승으로 흥선대원군이 되기 전에 그림을 좋아하던 이하응이 추사에게 난초를 배웠다.  소수운련암 물로 둥지를 틀고 구름으로 발을 삼은 암자라는 뜻으로 석파정을 짓기전 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바위에 새긴 글귀는 옛날부터 이곳이 아름다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적표현이다.  원래 석파정의 주인은 철종때 세도가 안동김씨 김흥근이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이 집 빼어난 풍광에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수차례 김흥근의 별서를 매매 제안을 했으나 이를.. 더보기
창덕궁 후원 이야기 (부용지, 연경당, 신선원전 일대) 부용지 일대처음 이곳은 그냥 언덕이었다. 그러나 15세기에 세조가 4개의 샘물을 찾아 연못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이 을 만들었다. 창덕궁 후원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정자가 무려 17개가 있고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정조가 부용정을 지은 이후 규장각을 설립 몇 대에 걸쳐 완성된 부용지이다.   부용정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부용은 연꽃을 의미하는데 연꽃처럼 연못에서 피어오른 듯한 정자라는 의미가 있다. 부용정은 연못에서 솟은 교각에 앞으로 정자가 튀어나온 모양인데 이 난간에 걸터앉으면 마치 배를 탄 듯한 느낌이다.   영화당 영화당은 왕과 신하의 연회장이며 과거 시험 응시자들이 마지막으로 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던 장소이다.  부용정에서 내려가면 4개의 정자가 .. 더보기
세종의 어린시절 및 즉위식. 세종의 어린시절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으로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이들 충녕대군이다. 첫째는 양녕대군으로 양녕대군 또한 똑똑했으나 하필 동생이 충녕대군(세종)이 다방면으로 천재성을 보인 충녕을 보고 넘을 수 없다는 걸 느꼈던 걸까?  첫째 양녕대군은 충녕에 대해 ' 충녕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라고 여동생에게 가서 충녕의 비범함과 양녕의 심정을 담은 기록도 있다. 양녕대군이 방탕해진 이유가 충녕대군(=세종)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날 태종이 하는 말을 들은 후 우연히 아버지 태종의 속마음을 알게 된 양녕이 일부러 방탕하게 굴었다는 야사도 있다. 양녕대군은 그후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선을 넘어 양녕대군이 사랑한 기생 어리를 간통하고 납치한 얘기를 세종이 고자질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국 초기 나라를 .. 더보기
묘효, 시호란? 세종대왕의 이름은 '이호' 로 그 당시 왕의 이름에 쓰인 한자는 백성들이 사용할수 없기 때문에 왕의 이름엔 어려운 한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묘호란?  죽은 이의 영혼이 위패(신주) 안에 깃든다고 생각하고 그 위패를 모셔둔 단지(=상자)를 신주단지라고 하고 신주를 놓던 그 자리가 신위, 그 신위에 붙이는 이름이 묘호로 그것이 바로 '세종' 이었다.  시호란?  시호는 그 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이름으로 세종의 시호는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  영문:문에 뛰어나시고  예무: 무예도 뛰어나시고  인성: 성품이 인자하시고  명효: 명석한 두뇌와 효도, 효성스럽다. 더보기
경회루 이야기 경회루는 태종 이방원이 서울로 돌아올때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지었는데 자신이 경복궁을 버린 것이 아닌 궁궐은 양궐 체제로 있어야 된다고 말하며 법궁으로서의 경복궁을 부각하려 경회루를 새로 짓게 한 것이다. 경회루는 천민출신 박자청에 의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성균관 문묘, 청계천의 광통교, 창덕궁의 금천교, 등을 만든 사람이다. 당시 경회루 공사에만 5천 명이 동원되었는데 1411년 8월 착공 1412년 4월 8개월 만에 완공이 되었다. 연회와 강연의 장으로 사용되었던 경회루는 옛날에는 담이 있어 왕과 일부 신하만 갈 수 있던 장소였고 안을 볼수가 없었다. 한 일화로 직급 낮은 관리가 담을 넘어 구경하다가 세종을 만났는데 세종은 노래 한 곡 해보라고 했다. 그만큼 은밀하고 풍류가 있는.. 더보기
한국 최초 서울전차 역사,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 한국 최초 전차 우리나라 전차는 70년간 운행이 되었는데 사실 서울에 남아있는 전차의 흔적은 전차 363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서 있는 381호 단 두 대뿐이다. 그런데 얼마전 이것의 흔적이 얼마전 발견되었다. 1899년 5월 4일 3시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되었다. 이것은 일본 교토에 이어 아시아 두 번째로 개통된 것으로 사람들은 이 전차를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동대문 안쪽에 차고지와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가 위치해 있었다. 전차가 도입되기 전 고종은 매번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명성황후의 묘, 홍릉을 행차하곤 했는데 당시 한성전기회사를 위탁 운영하던 미국인 콜브란 (H. Collbran) 이 이를 보고 전차를 도입하면 행차비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수익도 올릴 수 있다고 .. 더보기
거북선 구조 및 판옥선, 거북선 비교 거북선의 구조    거북선 용 머리가 있는 이유 가설 1: 화포를 넣어 발사했을 것이다.라는 가설이 있다. 가설 2: 나무로 된 배로 해전을 치루던 시기에 중요했던 무기는 상대방 배의 선수에 충돌하는 청동으로 된 무기였다. (충파 전법) 거북선 앞 용머리가 금속으로 만들어 충파 전술에 활용됐을 것이다.    거북선의 용머리에서 현자총통(대포)를 발사해야 하는데 ㄱ자 구조라면 대포 발사가 불가능하여 실제 용머리 형태는 일(ㅡ)자로 박힌 모양 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거북선 덮개는 철로 만들었다?  덮개의 재질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철이 아니다: 당시 기술로는 역부족 #철이다:철이 아니면 설명 불가능한 내구성 이 부분은 알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공포심을 심어준 것을 확실하다.  왜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