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썸네일형 리스트형 영화 암살 전지현 모티브 인물 : 남자현을 아시나요? 남자현이 독립운동을 한 계기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에서 지내온 인물로 을미사변 당시 남자현의 남편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 당시 임신 중이였는데 남편의 마지막 옷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남자현은 아들을 다 키우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한 후 남편의 복수를 위해 47세의 나이에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만주로 망명 후 독립군 부대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에 아들은 입학을 했다. 이렇게 남자현은 오랜기간 준비를 했고 실제 남자현은 총을 잘 쐇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무관학교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인 .. 더보기 동의회 엄인섭 독립투사에서 밀정으로.. (15만원 탈취 의거 ) 엄인섭은 누구? 엄인섭은 동의회 소속 독립 운동가였다.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항일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였기 때문에 엄인섭의 실체를 최근까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의 기밀자료가 공개되면서 엄인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1911년 부터 엄인섭이 정보를 보고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15만원 탈취 의거 엄인섭이 밀정으로 드러난 결정적인 사건은 간도 15만 원 사건이 있다.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제가 1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을 운송 중이었고 이것을 탈취해 독립군 문기를 구입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탈취와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된다. 이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이 체포가 되서 서대.. 더보기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의회, 권업회 만들다.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이다. 최재형은 재력가이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나 사실 최재형은 아버지는 노비 어머니는 기생인 노비 출신이다. 1860년대 함경북도를 덮친 흉년때 가난과 학정을 피해 수많은 한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을 갔다. 1869년에만 약 6000명의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했고 이에 러시아 정부는 토지를 제공, 세금 면제 등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최재형이었다. \러시아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익힌 최재형은 이후 배를 타며 선원 생활을 했고 생활기반을 다졌다. 최재형은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생활을 하며 통역과 군수사업으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며 출세의 기반을 다졌다. .. 더보기 북촌 한옥마을 어떻게 탄생했나? 정세권 그는 누구인가? 북촌과 남촌 북촌 한옥마을의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는다. 북촌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부터 쓴 명칭이다. 조선시대 북촌은 현재 가회동, 인사동을 포함 현재보다 더 넓었던 지역으로 왕족과 권세높은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근처에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북촌과 더불어 청계천 남쪽에 남산까지 아우르 지금의 명동, 을지로, 충무로 지역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북촌과 달리 남촌은 권세가 낮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북촌과 남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1880년대 후반부터 유입되어 남촌에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 사건 경술국치가 되고 한양의 이름을 경성으로 바꾼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의 세력이.. 더보기 독도 분쟁 문제 국제사법 재판소 재소해야 할까? 한국의 전략은? 1993년까지는 일본의 독도 문제 주장에 무대응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대응을 할수 없게 되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고 이때 무대응을 하게되면 국제법상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은 독도 땅이라고 반박을 해야 한다. 반박하지 않을 경우 소극적 인정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재판소에 가도 충분한 증거가 있기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일부러 가지 않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독도는 분쟁 지역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독도가 일본 것인지 한국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재판 거부 불가 즉 관할권.. 더보기 한민족 역사 (한민족 기준이란 :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는 우리민족인가?) 한민족 시작점 조선시대 쇄국정책 이전에는 국경이 엄격하지 않아 고려 시대까지는 자유롭게 다른 나라를 이동했다. 동아시아에 쇄국의 질서가 만들어진 건 1800년 도 말이다. 조선은 흥선대원군 시대, 일본은 도쿠카와 시대, 중국도 청나라 시대였다. 이 균형이 꺠진 것이 아편전쟁이었다. 이 아편전쟁은 아시아가 서양 오랑캐에게 너무나 크게 깨졌고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강제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일본 -조선 순으로 강제 개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주민 역사 이때 쇄국정책으로 묶여놨던 조선인들이 만주 땅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만주 땅은 성지로 생각해서 중국인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빈땅으로 놔뒀는데 바로 그 땅으로 조선인들이 이주한다. 만주를 이어 연해주까지 개척.. 더보기 고려인들은 누구인가? 고려인들은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로 스탈린에 의해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했던 우리 민족이다. 고려인 이주는 우리 이주민의 역사 중 가장 큰 비극일 것이다. 이주 초기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인이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스탈린이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한국인이 일본인 편을 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연해주에 살던 모든 조선 사람 18만 명을 일주일 통보한후 가축 화물칸에 실어 중앙아시아 사막에 던져 놓은 것이다. 이 강제 이주에 반발을 우려해 연해주의 민족지도자 약 2500명을 처형했고 당시는 광기어린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인종말살 정책으로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시기기도 했다. 이렇게 끌려간 고려인들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삶을 향한 지독한 노력으로 기적을 만들어 낸다. 국가가 .. 더보기 단골의 어원 : 무속과 관련된 지명들. .(영등포, 관우신, 관우 신앙 등) 단골 어원 옛날 삼남지방에서 무당을 자주 찾아가는 사람을 단골이라 불렀다. 혹은 무당을 '단골' 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무당을 많이 찾아갔다는 의미이고 이 말을 지금까지도 가게에 자주 찾아가는 손님 단골 손님을 지칭할때 사용하고 있다. 무속신앙 관련 지명들 지하철역 신당역도 지금은 새로운 신자를 사용하지만 원래는 귀신 신자를 사용했었다. 신당(무당집)들이 모여 있던 동네가 신당동이다. 영등포역도 음력 2월에 영등신을 맞이하여 무사 안녕과 생업 풍요를 기원하는 굿인 영등굿을 하던 곳이다. 영등굿을 하던 포구라는 뜻의 영등포이다. 동묘 관우신 모신 이유 동묘역도 또한 원래는 동관왕묘로 관우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서 싸움을 하고 승리를 했는데 명나.. 더보기 빨간색 이름 쓰기 금지 속설 : 한국의 미신 풍습 배경 빨간색 이름 쓰기 미신 기원옛날 진시황 시절에 황제의 이름만 빨간색으로 썻다. 누군가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황제를 참칭하는 것으로 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된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속설은 6.25 전쟁 당시 죽은 병사를 빨간색으로 표기한다는 유언비어가 미신으로 정착했다. 미신의 효능 (미신을 믿는 이유) 미신을 믿는 것이 인간을 생존 시켰다는 과학적 견해가 있다. '마이클 셔며'라는 과학자는 인간에게 믿음 엔진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관계가 없는 요인들 사이에서 패턴을 발견하는 것으로 인간은 믿음 엔진을 갖고 태어났다고 가정하며 원시 시대에 조류를 계산해서 바다에 나가거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인지 판단하려면 잎모양, 냄새 등 패턴을 알아야 했기에 경우에 따라 그것.. 더보기 평양에 남은 고구려 유적 (주몽 무덤, 동명왕릉이 북한에? ) 평양성 장수왕때 고구려가 평양성을 지을때 남긴 금석문 자료가 존재한다. 각자성석으로 글씨를 새긴 성 돌이다. 각자성석은 일명 실명제로 성벽을 쌓을때 성벽이 무너지거나 누군가 게으게 일하다 잘못쌓거나 하면 안되기 때문에 책임을 지우기 위한 시스템인 것이다. 그래서 성벽 곳곳에 각자 성석을 박아놓았다. 그중 하나는 일제시대 도로공사 중 옥류관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 평양성의 명승지로 고구려 시대의 성곽이 아직도 남아있다. 을밀대는 적을 감시하고 군대를 지휘했던 망루라고 볼수 있다. 동명왕릉? 남한과 북한의 연구가운데 엇갈리는 역사적 해석이 있다. 주몽의 무덤으로 동명왕릉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평양에서 후기 형태의 무덤에 묻힐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주몽은 고구려의 수도 졸본에서 .. 더보기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5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