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 피의 능선 전투 속 김병학 일병 유해.. 73년 만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두 형제가 드디어 만났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시작된 전쟁으로 1950년 8월 형 김봉학 씨는 입대를 하게 된다. 3개월 후 50년 11월 동생도 또한 형을 따라 전쟁터로 향했다. 3남 4녀 중 조국을 지키기 위해 6.25 전쟁에 참전했던 두 형제였다. 김병학 일병 유해 발견 1950년 12월 강원 춘천 부근 전투 983 고지에서 12월 24일 동생 김성학이 먼저 전사를 한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비극으로 동생 김성학 일병이 전사한 9개월 뒤 형 김봉학 일병마저 전사하게 된다. 형보다 먼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김성학의 유해였다. 그리고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6.25 전사자 유해의 신원을 확인했다. 전사자 유해의 신원은 고 김.. 더보기
하륜 이방원의 킹메이커 : 왜 정도전을 죽였을까? 72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 시대의 이인자이자 조선개국 일등 공신이다.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이 정도전이였다면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은 하륜이었다. 하륜은 태종 핵심 참모이자 굳건한 이인자였다. 하륜은 누구? 하륜과 정도전은 그들이 모시던 일인자 이방원 이성계와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된다. 1365년 고려 공민왕 시기에 개경에서 과거시험이 열리던 날이었다. 하륜의 고향은 진주였다 진주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었던 하륜의 집안은 사실 출세하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하륜은 나이가 들면서 집안 어른들과 다르게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서울에 올라온 하륜은 드디어 문과에 19세에 급제하게 된다. 과거 급제 후 하륜의 좌주는 이인복이라는 .. 더보기
6.25 정전협정 :역사상 최장시간의 회담 why? 6.25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린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한 유엔군. 통일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 중국군은 전투에 자신이 있었다. 첫번째는 인해전술로 대규모 병력으로 자신이 있었고 또한 이들은 이미 자국에서 국공 내전을 통해 풍부한 전쟁경험도 있었다. 정전협정 회담 장소 막상 6.25전쟁에 들어와보니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중공군이었다. 이에 무력으로 인한 종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정전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그래서 정전회담 첫 장소를 개성의 내봉장으로 정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때 있던 고급 요릿집이다. 그러나 개성은 대한민국이 점령했던 지역이 아닌 북한군의 적진이었다. 첫 회담을 위한 장소 선정에서부터 신경전이 있었고 결국 개성에 위치한 음식점을 선택해서.. 더보기
국풍 81 에 가려진 진실은? 국풍 81 이란? 국풍 81은 1981년 5월 28일부터 6.1일까지 여의도에서 개최되었던 축제이다. 이 축제는 독특하고 이례적인 면이 있다. 당시 대통령이였던 전두환의 지시로 열린 대규모 관제 축제였다. 국풍81은 5일간 열린 축제로 대규모 퍼레이드가 열리고 전국 특산물이 올라오고 민속놀이등이 진행되었다. 전국 대학생 6천여 명을 포함 연인원 천만 명이 참가했던 축제이다. 국민 4명중의 1명은 이 축제에 참여한 셈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당시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는데 축제기간동안 통행금지도 해제되었다. 국풍 81로 유명해진 음식들 통영에 충무김밥과 더불어 천안 호두과자, 강원도 춘천 막국수, 전주 비빔밥, 순창 고추장, 대구 따로국밥, 함흥 냉면, 서울 설렁탕 등이 소개되어 유명세를 탔다... 더보기
12.12 군사 반란 쿠데타 : 전두환의 권력 사용법.. [역사저널 그날 408]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다. 당시 최고책임자였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이었으나 합동수사본부장과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월권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은 권력을 행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취임한 후 거침없이 권력행사를 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10.26 사건을 쿠데타가 일어난 것처럼 행동하며 이것을 이용해 권력을 남용했던 것이다. 박정희 암살 10.26사태 이야기(10월유신,yh무역사건,부마민주항쟁)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6회 중] 주제: 10.26 사태출연자: 설민석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1961년 5월 16일.. 더보기
백곰 미사일 개발 이유 (지대지 미사일이란? ) 1968년 1월 20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었고 이틀 뒤에는 미 군함 푸에블로가 납치되었다. 1968년 10월 30일에는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다. 북한의 끊이지 않는 대남 무력 공세에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나고 날로 고조되는 한반도의 긴장감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까지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는 극비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미사일 백곰이다. 실제 백곰 크기는 12m가 넘는다. 200m 거리였던 이유는 이것을 개발하게 되면 전략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휴전선에 전략무기를 배치하면 북에 쉽게 노출이 되어 파괴되기 쉽기 때문에 최대한 서울 이남에서 발사했을때 평양을 타격가능한 거리가 200km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 더보기
우리나라 조선업 역사 : 현대 울산 조선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화를 결심한다. 조선 산업은 우리 삶과 밀착되어 있다. 모든 수출, 수입품을 실어 나르는 것이 배다. 화물 운송의 대부분 90% 이상이 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조선이다.. 조선업 민간사업된 이유 박정희 대통령 이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조선공사를 1950년 1월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킨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 산업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미국은 공군과 해군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때 퇴역한 배를 사 왔다. 대한조선공사를 만들고 6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후 1862년 대한조선공사를 공기업으로 경영하게 되고 이에 일본에 222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한다. 그러나 1.. 더보기
포니 자동차 역사 : 우리나라 첫 국산차의 시작 (역사저널 400회)* 1973년 중화학 공업화가 선언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조선등과 함께 자동차 공업 육성을 주요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1년 뒤 1974년 10월 대한민국 자동차의 시작 '포니'가 탄생한다. 포니 이전에는 해외 차종을 수입, 조립한 국내 자동차 회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포니가 국산차의 포문을 열었다.  포니 자동차 기록식민 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의 꿈 중 하나는 자신의 고유한 브랜드를 갖는 것이다. 당시 첫번째 포니 출고 가격은 227만 3270원이었다.  출시 첫해 약 1만 726대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당시 시장 점유율 43.6%에 달한다. 그 다음해에는 54.1%로 급상승한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차 중에 반은 현대 포니였다는 얘기다. 처음에 만들때 80%가 국산화되었다. 현대 국산 자동차 생산 프.. 더보기
월미도 놀이기구가 많은 이유 미국 뉴욕에 코니 아일랜드가 있다. 코니아일랜드와 월미도는 너무 비슷하다. 미국 역사상 코니아일랜드의 전성기 1920년이고 월미도 또한 1920~30년대가 전성기였다.   *대관람차는 조지 워싱턴 게일 페리스 주니어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어 페리스휠(Ferris wheel) 이라 부른다. 월미도의 전성기 1920~30년대는 일제 강점기로  해수탕, 물놀이장, 호텔 등 유원지로 각종 오락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월미도와 코니아일랜드는 놀이공원도 두 개씩 있다. 당시 코니아일랜드는 업계의 표준이 된 것이다. 유원지를 짓는 조건은 도시, 바다, 교통수단인데 코니아일랜드도 맨해튼이라는 대도시가 있고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하루에 왕복할수 있는 거리에 코니아일랜드가 위치해 있고 그곳에 놀이공원을 만드는 것이 .. 더보기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 최초의 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최초의 근대식 호텔 :대불호텔 인천의 근대화 거리는 역사의 흔적이 남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최초의 근대식 호텔 대불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터만남아 있고 박물관을 만들어 터만 확인 가능하다. 1888년 일본인 해운업자가 개관한 대불호텔은 건물은 중식당을 거쳐 사라졌다가 2018년에 터 위에 전시관으로 복원했다. 아펜젤러 감리교 선교사, 언더우드 장로교 선교사들의 당시 기록은 우리나라가 더려웠다는 것이 대부분인데 초현실적으로 옷은 모두 새하얗던 당시 조선인들이라고 기록한 내용이 있다. 인천에 최초의 호텔이 만들어진 이유는 대불호텔은 인천에서 서울을 가려면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호텔이 대불호텔이다.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개항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