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사는 1950년~2000년대 3김 시대로 한국 정치사의 중심에는 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있었다.
김영삼 : 민주당의 뿌리
김영삼은 만 25세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등장한다. 이후 무려 9선에 성공한다. 1952년 1차 개헌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택산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다. 젊고 잘생겼는데 금수저이기까지했다.
김영삼은 이승만이 속해 있는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는데 이승만이 장기 집권 계획을 위해 개헌을 또 하겠다고 하니 직접 개헌 반대를 외치게 된다. 그러나 결국 2차 개헌이 의결되자 탈당을 결심한다. 그때가 당시 개헌에 반대한 범야당 연합 '호헌동지회' 가 생기고 김영삼은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민주당의 뿌리가 된다.
김종필 제일 논란인 문제는...
5.16 군사정변부터 제 3공화국 탄생까지 제일 핵심 인물은 김종필이었다. JP 김종필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
JP는 민주공화당 창당을 주도한 인물이다. 또한 이때 김종필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젊은 정치인들을 섭외했고 민주공화당의 기반을 닦아준 곳이 현재의 국정원인 중앙정보부 창설이었다.
그 당시 김종필은 정보기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종필은 1961년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1963년 초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다.
김종필 역시 머리도 뛰어났고 부유했던 유년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광복해서 돌아왔다. 김종필은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이다. 이때 육군정보국에 보직 배치를 받았었고 이곳은 엘리트 of 엘리트만 갈수 있던 코스였다. 이곳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이 만난 것이다.
박영옥과 결혼한 이후는 박정희와 군대 선후임 관계에서 가족이 된 것이다. 박정희 형은 일찍 죽고 혼자있던 조카의 남편으로 들어온 김종필이였기에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애착이 컸다고 한다. 70년대 되면 골치 아픈 일이 있을때 마다 JP를 불렀는데 항상 부부를 같이 불렀다. 그렇게 김종필은 박정희를 든든하게 보좌하는 2인자였다.
한일협정과 김종필의 관계
김종필의 제일 논란인 문제는 한일협정이다. 한일기본조약이라고 하는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국교정상화와 청구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인데 조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인물이 김종필이다.
한일회담은 이승만 정권 시기부터 계속되었다. 당시 반일 감정이 컸던 탓에 협상 난항을 겪던 와중 박정희 정권 때 한일협이 극적으로 타결된다. 한일협정 3년전 김종필이 일본 외무장관을 만나 협상하며 큰 역할을 했다.
한일협정 청구권 협상 결과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 제공 , 차관 2억 달러를 10년간 제공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했는데 그때 합의를 할때 썼던 메모가 공개된 것이다. 국민들은 밀실 야합이냐고 분노, 식민 지배를 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여러가지 조치없이 이루어진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한일협정을 부정적 입장이 있었다. 어쨋든 당시에는 거셌던 한일협정 논란이었고 한일협정 이전까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꽤 높았는데 이때 지지율이 확 떨어졌다.
김대중 4전 5기
광복 후 고작 20년인데 반일 감정이 거셌던 국민들에겐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때 마지막으로 등장한 인물이 김대중이다.
김종필과 오히라가 한일협정에 대한 밀담을 하는 과정에서 김종필이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김준연 의원이 폭로를 하게 된다. 이것을 빌미로 공화당은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김준연을 고소한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면책특권이 있기때문에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가 불가능했고 이에 당시 구속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시간 끌기였다.
필리버스터 스타 김대중
이에 의회 안에서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기 위한 무제한 토론인 필리버스터 스타로 김대중이 등장한다.
무려 5시간 19분간의 토론으로 1964년 당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던 엄청난 기록이었다. 당시 민주당에서 제일 언변이 좋았던 인물이 김대중이었다. 처음엔 김대중 의원은 필리버스터를 거절했다. 부담감이 컸던 일이나 결국 이를 수락하고 한일협정 반대에 대한 내용을 일목요연 논리적으로 설명했고 김준연 의원이 체포되면 안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서 체포동의안을 막아냈던 김대중 의원이었다. 이것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후 김준영 의원은 체포가 된다.
김대중 의원은 목포에서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1958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려 했으나 방해공작으로 출마를 하지 못한다. 5번의 시도끝에 당선에 성공한 김대중이다. 그런데 당선 이틀 뒤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국회가 해산되면서 당선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963년이 되어서 도전한 지 9년만에 목포에서 첫 국회의원직을 시작하게 된 인물이다.
이후 1960년대에는 야당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1967년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 선거가 끝나고 나니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었고 3선까지 할수 없나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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