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썸네일형 리스트형 드라마 연인 속 주화파 VS 척화파 논쟁 , 광교산 전투 , 그리고 ... 주화파 대표적 인물 최명길이 있다. 척화파의 대표 인물 김상헌이 있다. 인조 옆에 주화파의 특징은 실무가 중요한 현실주의자들이었고 청과의 전쟁을 막아 현실적 피해를 줄이는데 주력하고자 했던 세력이었다. 반편 척화파의 특징은 명분이 중요한 원리주의자 세력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어떤 게 정의고 합리적인 건지 고려했던 세력이었다. 당시는 국제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존망과 직결된 문제를 두 세력모두 쉽게 결정할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왕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오던 근왕군들은 패배를 이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혹한기까지 이어져 줄줄이 병사들은 병들고 얼어 죽어갔다. 광교산 전투 그러나 모든 전투에서 패한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속에 손에 꼽는 대승 광교산 전투.. 더보기 드라마 연인의 이장현은 실존인물? 이장현이라는 인물은 없고 '장현' 이라는 인물이 있다. 성이 장 이름이 현 장현 역관 출신에 집안은 대대로 역관 집안으로 당대 최고 부잣집의 아들이다. 인조부터 숙종 때까지 두루 활약했던 장현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갈 당시 장현도 같이 동행하게 된다. 심양에 머물며 주요 인물과 은밀히 교류하며 당시 정세 파악에 큰 도움을 줬다. 이후 그 공로로 수석역관은 물론 수임으로 있던 40년 동안 연경에 간 것이 30여 번이고 여러 공무에 있어 그의 주선에 힘입은것이 많았다. 장현의 외모 또한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하였다. 통문관지 내용을 보면 잘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보기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 선택 이유 ? 그날 430 이전글 보기 현재 우리는 6공화국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헌법은 1948년 9차례 개정되었으며 지금의 헌법은 제 6공화국 헌법으로 6월 항쟁 이후 개정된 헌법이다. 이 헌법을 만들기 위한 능력있는 소수의 사람이 필요한데 헌법을 만들 당시 8인 정치회담을 구성했다. 1987년 7월 8인 정치회담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4명과 당시 통일민주당 4명으로 구성되었었다. 그리고 계파별로 들어갔다. 이는 전두환+노태우측 4명과 김영삼 측 2명+김대중측 2명으로 여야 총 8명이 모여 개헌안 논의를 했었다. 6공화국 헌법 쟁점 사항 개헌 이후 치뤄질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의견을 반영 및 논의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대통령 임기와 단임제인지 중임제인지가 쟁점 사항이었다. 당.. 더보기 선형공원 경의선 숲길 공원 : 연트럴파크, 뉴욕 하이라인 (Q 1-3) 이전글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역사 : 자유공원, 탑골공원, 어린이대공원 (Q 1-2)경의선 숲길 공원 : 연트럴파크 공원은 도시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진화해왔는데 도시의 일부를 넘어 도시를 살리는 존재로 역할을 하기시작했다. 근대 도시의 산물인 공장과 철도 산업시설, 문류시설들이 산업구조의 변화로 문을 닫기 시작했고 폐기되고 방치되면서 큰 문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이곳을 공원으로 바꿔 공간재생을 위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 예로 연트럴파크가 있다. 정식명칭은 경의선 숲길 공원이다. 경의선이 지나가던 철로를 경의선을 지하화 하면서 버려지게 되었는데 공원으로 바꾸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낙후된 철길 주변 지역이 공원과 함께 급부상하게 되었다. 경의선 숲길의 길이는 6.3km 로 길이는 센트럴.. 더보기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역사 : 자유공원, 탑골공원, 어린이대공원 (Q 1-2)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자유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은 개항 도시 인천에서 만들어졌다. 지금은 자유공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각국공원이다. 1888년에 인천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이다. 각국 조계지내에 위치해서 각국 공원으로 불려졌다가 해방 후 만국공원, 1957년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 후 자유 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 이곳 기상대에서 매일 12시에 포를 쏘아 시간을 알려주기도 해서 오포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데 몸은 인천 앞바다를 향하고 있고 눈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를 향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사진 찍는 컨셉을 중시여기는 사람으로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과 절대 사진을 찍지 않았고 선그라스와 파이프를 문 모습의 사진을 찍기 좋아했다... 더보기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나?! 근거는? (그날 431) 고구려 668년에 멸망하고 그 뒤로 250년 뒤에 918년에 고려가 건국된다. 고구려와 고려사이에는 25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다. 그러나 조선은 5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외침을 겪었던 반면 고려는 존속 기간 내내 외침에 시달렸다. 993년~1019년 고려 거란 전쟁이 약 30년, 1107년 윤관의 여진정벌이 있었으며 다시 100년 뒤에 1231년~1259년 몽골의 침입이 이어졌다. 마지막 14세기 후반 공민왕 때는 위에서는 홍건적의 침입, 바다에서는 왜구의 출몰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고려의 무기 체계와 전쟁기술이 발달되어 있었다.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이 담판 993년 거란 고려 침략이 시작된다. 옛 고구려땅인 압록강 일대를 내어놓고 통교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고려는 서경 이북의 땅을 내어주고 거란과.. 더보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배경 설명 : 거란이 고려를 공격한 이유 인물설명 고려 거란의 26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종과 강감찬의 이야기이다. 993년~1019년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 고려 제 8대 황제 현종역으로 제국의 아이들 김동준이 나온다. 고려는 최종이 세웠다가 유동근에게 망한 나라.. ㅋㅋ 통일신라 말기 왕족의 분열로 혼란에 빠진 신라는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스타, 호족들이 스타로 떠올랐다. 궁예, 왕건, 견훤이 중심이되었고 최후의 승자는 왕건이었다. 왕건은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워 나라의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공표한다. 그러나 고려는 존속하는 내내 외침을 격게 된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역을 맡은 최수종이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강감찬은 체구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으며 옷차람은 더럽고 낡아서 보통 사람보다 못했다고 나와 있다. 거란이 고려를.. 더보기 포항 연오랑와 세오녀 설화 의미 포항은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먼저 해와 달을 만날수 있는 곳이다. 그 중에 영일: 해를 맞는 땅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에 해와 달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 아주 먼 옛날 신라 땅에 한 어부가 바닷가에서 해조를 캐고 있었는데 그런데 처음 보는 바위에 해조가 가득있었다. 그래서 그 바위 위에 올라가 해조를 캤다. 정신없이 해조를 캐고 있는데 갑자기 이 바위가 둥둥 떠내려가더니 동쪽 바다끝 일본땅에 도착했다. 깜깜하게 살고 있던 일본땅에 해가 쏟았고 사람들은 그 어부를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며칠 뒤, 아내 또한 남편이 탔던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남편을 만났다. 그랬더니 캄캄한 밤에 갑자기 밝은 달이 솟았고 두 사람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반면 해와 달이 사라진 신라는 혼란이 .. 더보기 용비어천가 6용은 누구? 준경묘 백우금관의 전설 용비어천가 6용 용비어천가 1장 1절에는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동쪽 바다에 여섯 용이 나타나니 하는 일마다 하늘이 돕는다는 내용으로 조선왕조의 탄생을 찬미하는 가사가 적혀있다. 6 마리 용은 목조: 이안사, 익조: 이행리, 도조: 이춘, 환조:이자춘, 태조:이성계, 태종:이방원인데 이 6마리 용 , 전주이씨 가문의 가장 큰 아버지 이양무의 무덤이 삼척 준경묘이다. 준경묘는 오후 3시만 되도 무덤에 그늘이 질정도로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다. 조선 왕조의 태동을 예언한 백우금관의 전설이 있는 장소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묘가 있는 곳으로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 여겨지는 곳이었다. 백우금관의 전설 전주에서 무관으로 일하던 이안사는 전주로 부임한 산성별감과 기생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 더보기 내장산 용굴 속 조선왕조실록 이야기 내장산에서 가장 깊고 가파른 금선계곡 속에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국보제 151호로 조선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으로 조선왕조는 이 기록을 4부를 만들어 한양에 있는 춘추관과 전주, 충주, 성주에 있는 사고에 보관했었다. 사고가 시내 한가운데 있다보니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첩첩산중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전주사고에 있던 기록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 사라졌다. 이때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동굴속으로 옮겨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중 전주 가까이 왜군이 공격해 오자 안의, 손홍록이 30여 명을 이끌고 조선왕조실록과 어영을 64궤짝에 싣고 이곳으로.. 더보기 이전 1 ··· 24 25 26 27 28 29 30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