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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거란의 2차 고려 침입: 강조와 양규 장군의 죽음 [이전글] 거란 1차 침입 993년 거란의 1차 침략 이후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켜 천추태후를 권좌에서 몰아낸 상황이었다. 이에 1010년 거란 6대 황제 야율융서는 강조의 변, 현종의 즉위를 거란 침략의 빌미로 삼아 그해 11월 거란 황제가 직접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공이었다. 거란 2차 침공 이유 거란은 건국 초부터 권력싸움, 갈등이 황제가 죽을때 마다 빈번했다. 고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던 해 거란에서는 성종 모친 승천태후가 사망했다. 거란의 성종은 12세에 즉위하고 어린 황제 대신 어머니 승천태후가 섭정만 27년을 했던 것이다. 승천태후가 사망했으니 어머니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성종은 자신의 권위를 .. 더보기
천추태후 이야기 고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딸, 5대 경종의 후비, 6대 성종의 여동생이며 7대 목종의 어머니, 8대 현종의 이모가 된다. 고려시대 5,6,7,8 대 왕이 천추태후라는 인물을 거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고려 초기 12년간 섭정을 했고 외척과 간통해 악날한 왕으로 그려져 있다. 천추태후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사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려사는 조선 전기 유학자들의 성리학적 관점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천추태후라 불린 이유천추태후가 거쳐했던 곳이 천추궁이였다. 아들 목종이 즉위하고 자신이 기거하던 수강궁 한켠에 어머니만을 위한 독채 천추궁을 만들어줬다. 천추는 천년의 가을이란 뜻으로 만수무강의 의미 아주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추궁에 있는 태후라는 뜻에서 천추태후라고 부른.. 더보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해산 과정: 한성감옥 사진 속 20대 청년 이승만 모습 한성감옥 죄수들은 누구? 사진 속 이승만 대통령은 젊은 시절 독립협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1899년 고종폐위음모에 가담한 죄로 역모죄로 무기징역 선고 후 쇠사를로 결박까지 당하면 한성감옥에 들어갔다. 이상재 선생은 황성기독교 청년회, 국내에서 YMCA 운동을 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고 그의 아들이 이승인씨로 사진 위에 있는 인물이다. 이들이 찍은 사진의 장소는 구한말에 세워진 서대문형무소 이전의 한성감옥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성감옥 역사 한성감옥은 조선에서 법무부 역할을 했던 기관으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형조 관할의 전옥서 (감옥의 역할을 한 구치소같은 곳) 같은 곳으로 1894년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각종 기관을 근대적으로 개혁하면서 예전에 포도청이었던 곳을 경무청으로 바꾸고 경무청 산하의 감옥서.. 더보기
무주 나제통문의 비밀 전라북도 무주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의 접경지로 군 전체가 소백산맥에 속한다. 골짜기는 깊고 산세는 험준하다. 무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구천동 계곡이다 제 1경 나제통문의 비밀 이 아름다운 무주 구천동은 삼국시대에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무주 구천동 33경의 시작점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석모산이 있는데 1500년 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석모산을 경계로 말투와 생활이 다른 주민들이 살고 있다. 석모산 나제통문을 통해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 왕래를 했다고 한다. 이 경계에 세워진 나제통문을 역사적 통로라 믿었다. 이 일대는 신라와 백제가 영토 확장을 위해 맞붙었던 곳으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 영토확장을 위한 두 나라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던 곳이다. 나제통문.. 더보기
만부교 낙타 사건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10세기 초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던 시기 한반도 서북쪽 시라무렌강 일대에 유목민들의 나라 거란이 세워진다. 훗날 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다. 약 8년간 고려와 발해는 공존했던 시기가 존재한다. 만부교 낙타 사건 942년 거란이 고려와 화친을 맺기 위해 사신 30명과 낙타 50마리를 고려에 보낸다. 왕건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하여 이웃으로 삼을수 없다고 했다. 이에 왕건은 거란 사신 30명을 유배 보내고 낙타 500마리를 만부교에 묶어 굵겨 죽인다. 만부교는 일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여 만든 다리로 개경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반드시 거쳐야 했던 다리이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다리 밑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간 낙타 50마리였다... 더보기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떻게 확산이 되었나? 131 -1 유럽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계기는 영국에 의해서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전 세계 인구의 1/4 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영향을 받아 인도, 아프리카등 여러 나라에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파되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시절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장식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부근 앨버트 경은 독일 출신이었다. 이 앨버트 공이 독일의 트리 문화를 영국 왕실에 가져온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1517년 마틴루터가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마틴 루터가 밤에 전나무를 보는데 전나무에 별이 걸려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이에 전나무를 집에 가져와 장식물을 걸어줬다고 한다. 이후 1840년경 .. 더보기
동양척식 주식회사 : 목포 근대역사관 2관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우고 제국주의 침략을 민영화한 것이다 .정부나 왕실 소유의 농토, 숲, 산지 등이 조선총독부 소유로 넘어가고 이것을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겨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살수 있게 했다. 일종의 부동산회사였다. 처음에는 농지부터 시작했던 수탈이 점차 광산, 금융까지 확대되어 갔다. 중일전쟁이후 전쟁 물자가 필요해진 일본은 놋그릇, 제기 등 쇠붙이를 모두 공출해간다. 모든 것을 공출당해서 밥그릇이 없게 되자 일본에서 사기로 만든 밥그릇에 결전, 보은 등의 글자를 적어 일본 왕의 하사품이라고 준 밥그릇이다. 그러나 일본은 밥그릇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밥그릇이고 크기가 작아 들고 먹는데 우리나라는 고봉밥이다. 더보기
제주 출륙금지령 억압의 땅 역사.. : 제주목_관아 , 관덕정 제주목_관아 옛날 제주도는 탐라국이라고 해서 원래 독립된 문명으로 존재했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3성의 시조가 나타나 생긴 나라라는 설화가 있다. 통일신라때부터 문화적 교섭이 시작되었고 신라가 탐라를 끌어들이려고 탐라 우두머리에게 성주, 왕자 등의 작위도 주었다. 고려 중기때부터 고려의 행정체계에 탐라가 편입이 되었다. 제주에 지방관을 고려 중앙 정부가 파견하고 제주목이 된 후, 조선 시대까지 유지 되었다. 그래서 제주목 관아는 역사적인 제주 행정의 중심지로 제주목 관아의 옛날 이름은 성주청이었다. 목 관아 앞에 있는 정자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관아 건물로 1448년 제주 목사 신숙청이 창건 현재 보물 제 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 관덕정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을 .. 더보기
유교란 무엇인가? 삼강행실도 내용 87 -1 오늘날까지도 명절이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유교로 부터 시작된다.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유교이고 현재까지 많은 유교 관습이 남아있다.  유교란 무엇인가?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공자가 체계화하고 설파한 사상을 유교라 불렀다. 원래 공자의 사상은 학문으로 유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종교적 의미를 내포한 유교라는 단어를 쓰기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유교는 학문인 유학에서 시작된 것이다.    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계속된 전쟁으로 극도의 혼란 상태였다.  백성들은 고통받고 도덕과 정치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때 공자가 인간답게 살려면 각자의 본분과 질서를 지켜야 .. 더보기
공산 전투 이야기 : 대구에 남아있는 왕건의 흔적들.. 경애왕의 최후 후백제 견훤의 목표는 삼한통일이었다. 그리고 마침 927년 신라 서라벌을 점령한다. 견훤 군의 공격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애왕은 견훤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모욕하고 경멸했고 결국 경애왕을 자신의 앞에서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 준 것이다. 견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이렇게 해석된다. 견훤은 신라의 장수 출신이다. 그래서 대의명분과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라왕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함도 포함된다. 공산전투 한편 견훤의 서라벌 점령 소식에 고려 왕건은 신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신라고 진격한다. 왕건은 마음이 급해졌고 정예 기병 5000을 이끌고 신라로 향했다. 왕건은 쉬지 않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