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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이중섭 화가 작품읽기, 해석: 아이 그림이 많은 이유, 러브스토리 MoMa 에 전시된 이중섭 그림 3개는? 이중섭은 국내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매료시킨 화가로 20세기 한국 화가 중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작품 3점이 전시되어 있는 화가이다. 미국 공보원장 아더 맥타가트가 이중섭 화가의 팬으로 개인 경매에서 구입후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을 하면서 이중섭 화가의 작품이 등록되게 된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에서도 1488점 중 104점이 이중섭 작품일 만큼 이건희 회장도 자랑했던 화가이다. 이중섭 화가가 제주도도 온 이유 1952년 6.25 전쟁 중 제주도로 피난 온 이중섭은 1년여정도의 제주도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 것이라 추측한다. 제주도 자구리 공원에는 이중섭 화가와 아내가 함께 매일 산책했던 산책로를 만들어 놨다. .. 더보기
이중섭 흰소 , 황소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 이중섭 소를 많이 그린 이유 이중섭 화가는 오산 고등보틍학교를 들어가 임용련 미술 선생님을 만났고 이것이 그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가장 조선인 다운모습으로 조선인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중섭이 선택한 그림이 바로 소였다. 이중섭 화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조선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소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소의 이미지가 긍지를 잃지 않고 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조선인의 의지를 담아낸 것이 소 그림이다. 1940년대 이중섭 작품 1940년 대 이중섭 작품은 대부분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불타버렸다. 사람들은 이중섭 화가는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작품에 잘 담아서 그린 화가 중 한명이라고 말한다. 1953년에 그린 황소와 1956년 .. 더보기
제주 4.3 사건 :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이유.. (순이 삼촌 )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민간인 1만 4천여 명을 희생시킨 비극적인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또는 일제에서 막 해방된 미군정 상태의 한국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꿈꿨던 남조선 노동당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램과 달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가 예고된다. 제주도 안 남로당 조직은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고자 했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의 남로당 350여 명은 제주 경찰서 지서들을 무장공격한다.  그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 학살과 탄압이 시작된다. 정부토벌군 강력한 반격,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쓴다.  무장 봉기대와 경찰 경비대 , 토.. 더보기
반지하는 우리나라에만 있나요? 반지하 용도 이럴수가 !! [알쓸별잡 7회 중]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 특히 많은 이유는 6.25 전쟁 이후에 나중에 전쟁이 혹시 또 일어나면 시가전을 위해 도시에서 전투를 벌일 때를 대비해서 참호처럼 반지하에 들어가서 창문에 총을 놓고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법적으로 반드시 반지하를 지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1960~70년대에도 남북간의 긴장은 이어지고 있었고 한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전쟁에 대비해 주택마다 지하실을 만들 것을 법제화했다. 방공호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하실을 임대하는 것은 불법이었으나 80년대 주택 부족 사태가 극심해지면서 반지하 임대요건이 완화되었다. 그래서 전쟁을 대비해서 지은 반지하가 우리나라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에서는 반지하를 금지하는 추세다.. 더보기
창신동 절벽마을 역사,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 있는 이유 ~ 창신동 절벽마을이란? 창신동에 가면 40m 정도의 가파른 수직 절별이 있다. 창신동은 사대문안 동대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성곽길의 서쪽은 혜화동이고 오른쪽은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원래 옛날에는 채석장이었다. 일제 강점기때 서울에 많은 석재 건물을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산들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된 돌산이여서 그곳에서 돌을 떼서 가져와 건물을 만들었다. 서울 곳곳은 석재를 채취하기 위해 깍여나갔다. 해방 이후 깍여나간 산 주위로 주거지가 생기고 역사를 담은 독특한 공간이 되었다. 과거 사대문 바깥쪽에 위치해 있던 창신동은 빈땅이었다. 그래서 채석장으로 사용했었다. 서울의 50년 역사를 볼수 있는 창신동 이곳 창신동은 50여년간의 서울 건축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시대 성곽이고 일제강.. 더보기
김삿갓은 누구? 유명한 시 , 삿갓을 쓴 이유 , 무덤은 어디? 73 조선의 27대 왕 순조가 다스리던 시기에 방방곡곡을 떠돌며 살았던 김삿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삿갓의 신분은 기반 세력과 살림이 아주 보잘것 없는 양반인 잔반이었다. 잔반은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몰락한 양반을 뜻한다.  김삿갓은 누구? 김삿갓은 집안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높은 위세를 자랑했던 장동 김씨 집안이었다. 안동 김씨의 분파로 장동 김씨 가문이었고 경복궁 북쪽 근처에 위치한 지금의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을 일컫는 지역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었다.  아버지는 김안근으로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동 김씨들은 안동 김씨에서 분파되었지만 순조의 외척이였기 때문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 생각했다. 그들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펼쳤던 세력.. 더보기
시인 백석 이야기 백석은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중 한 명으로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고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였고 민족주의적이고 향토적인 모더니즘 문학의 대명사였다. 백석의 키는 190cm 정도 되었다. 백석이 광화문 거리에 나타나면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 같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백석 유년시절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기엔 평안북도 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민족교육의 산실과도 같은 곳으로 3.1 운동 때는 학생과 교사가 단체로 참여할 정도였다 백석 선생의 6년 선배가 김소월 시인이다. 보통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갔다. 이유는 조선에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석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여서.. 더보기
서애 류성룡과 징비록 내용은 무엇? (알쓸신잡 2 유시민 버전) 서애 류성룡은 누구인가? 안동에 가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 서애 류성룡이다. (1542~1607) 류성룡은 25세 젊은 나이에 과거 급제하고 선조 세자시절 중앙 정부로 진출을 했고 선조가 즉위할 때부터 왕을 보좌했다. 30년을 넘게 선조 밑에서 벼슬을 한 인물이다.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삼정승을 역임, 도체찰사로서 군무를 총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전란의 조짐을 느낀 선조는 좋은 사람을 추천해보라고 류성룡에게 말했고 그때 류성룡이 추천한 인물이 이순신과 권율 장군이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종 6품 현감에서 정 3품 전라좌수사로 7 단계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사실 이전에 이순신은 곧고 강직한 성품때문에 벼슬길이 늦었었다. 이런 이순신을 류성룡이 어릴때부터 눈여겨본 동네.. 더보기
전기 뜻 , 무엇인가? /석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신재생 에너지 문제점은? 전기의 어원 인류가 전기를 인식하고 활용한 것은 문명이 시작된 이후이다. 전기를 영어로 electricity라고 부르는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호박보석을 모피에 문질렀는데 가벼운 물체가 달라붙는 호박보석에서 정전기가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호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호박의 그리스어가 electron이다. 전기는 어디서 왔나? 전기는 발전소에서 만들어진다. 화력 발전소의 전기는 석탄으로 불을 지펴서 물을 끓여서 만들어진다. 전기는 결국 땅속의 석탄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석탄은 어디서 왔는가? 석탄은 3억 년 전의 나무가 죽어서 썩지 않은 채 쌓인 것으로 그때만 나무가 썩지 않았다. 석탄은 결국 3억 년 전의 나무에서 온 것이다. 그 당시는 나무가 최초로 몸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고분자 리그닌을.. 더보기
신당동 힙당동 !? 가수 이효리가 신당동 빌딩을 매입했다는 얘기로 한동안 신당동은 시끄러웠다. 그래서 일까? 신당동이 힙의 성지가 되고 있다. 노포가 늘어선 중앙 시장에 전파는 가게, 생선 파는 가게, 널어놓고 쌀을 파는 가게들이 있지만 그 옆에 소위 젊음이들의 힙 플레이스가 공존한다. 구석구석 작지만 독특한 가게들이 숨어있다. 이색 컨셉으로 볼거리가 다양해지고 있다. 힙 플레이스 : 아는 사람만 가는 곳 핫 플레이스: 누구나 알고 있는 곳 요즘 힙 플레이스들은 간판이 없다. 아는 사람만 SNS 로 조사해서 간다. 신당동은 원래 신을 모시던 당이 있던 데라서 신당동이다. 그래서 신당동에는 무당집이 많다. 그 콘셉을 그대로 살린 주점이다. 떡볶이 역사 (신당동 타운 마복림 할머니 즉석 떡볶이/어묵 역사 등) 떡볶이의 역사 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