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년 거란의 1차 침략 이후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켜 천추태후를 권좌에서 몰아낸 상황이었다. 이에 1010년 거란 6대 황제 야율융서는 강조의 변, 현종의 즉위를 거란 침략의 빌미로 삼아 그해 11월 거란 황제가 직접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공이었다.
거란 2차 침공 이유
거란은 건국 초부터 권력싸움, 갈등이 황제가 죽을때 마다 빈번했다. 고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던 해 거란에서는 성종 모친 승천태후가 사망했다. 거란의 성종은 12세에 즉위하고 어린 황제 대신 어머니 승천태후가 섭정만 27년을 했던 것이다. 승천태후가 사망했으니 어머니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성종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반전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1차 침략 후 거란의 세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1004년 연운 16주를 차지하고 송과 전연의 맹약을 체결한다. 연운 16주는 만리장성 이남의 땅을 획득한 것이다. 거란의 오랜 숙원이었던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장악한 것이다.
양규의 흥화진 전투
압록강을 건너 침입한 거란군의 첫 목표는 흥화진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강조의 변을 이유로 들었고 목종 때 송에 사신을 보냈던 일에 반발하며 이로 인해 다시 공격을 한 것이다. 이때 거란은 변을 일으킨 강조를 내놓으면 회군하겠다고 했으나 흥화진의 양규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양규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단 3천명이었고 거란은 40만 대군이었다. 흥화진을 포위한 맹령한 공격을 퍼부었고 7일동안 치열한 공성전이 이어졌다. 고려군은 버텨냈고 거란은 흥화진 함락에 실패했다.
강조의 죽음 (삼수채전투)
거란의 다음 목표는 통주로 현재 평안북도 선천지역이다. 통주에는 강조가 거란군을 맞서 싸웠는데 거란의 기마부대와 고려 검차를 이용한 초반 승리에도 불구하고 강조의 군대는 결국 거란에 패배한다. 패배의 원인은 강조의 자만심이었는데 여러차례 급보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바둑을 두는 여유까지 부려 결국 강조는 포로 신세가 되었고 고려군은 무려 3만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하게 된다. 이후 강조는 거란에게 처형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강조의 패배 이후 강동 6주가 무너진다. 그리고 거란군은 청천강을 넘어 서경, 개경까지 진격하게 된다. 이에 결국 고려의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된다. 이 시기에 궁궐, 태묘등이 불타고 수많은 민가도 불타버린다. 당시 거란군의 방화로 고려의 사서들이 소실된다.
서경이 공격을 당하기 시작하니 신하들은 거란에 항복을 하자며 현종을 압박하지만 이에 강감찬은 시간을 끌며 방법을 찾자 현종에게 몽진을 먼저 제안한다.
양규의 활약
거란 2차 침입때 양규의 활약이 없었다면 고려의 역사가 바뀌였을 것이다. 양규는 거란의 거점이 된 곽주성을 병력 1700명으로 급습한다. 이때 곽주성을 지키던 거란의 수비병은 6000명이었으나 탈환에 성공한다. 양규는 흥화진을 수성하고 곽주성을 탈환한 후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면서 거란의 2차 침입때 거란을 상대로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양규 장군의 죽음
거란의 성종이 강조를 죽인 후 강조가 명하는 척하며 항복하라고 양규에게 가짜 서찰을 보냈는데 왕의 명이 아니라 끝까지 거란과 싸웠다. 원군도 없이 한달 사이에 모두 일곱 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3만여 명을 되찾았다. 양규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1차와 달리 외교의 과정이 없어 전쟁의 참혹함이 여실히 드러난 2차 전쟁이었다. 거란의 1차 침공 당시 고려는 성종을 중심으로 정치가 안정되어 있었고 안정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서희 같은 명장들이 활약할수 있었으나 2차 침입때는 목종이 시해당하고 현종이 왕에 오르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국방과 외교에 힘을 발휘할수 없었던 것이다.
거란이 퇴각한 이유
현종은 피난 중에 거란군 진영에 사신을 보낸다. 그리고 왕은 이미 먼 곳으로 피난을 갔고 군사를 돌리면 친히 알현하러 올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거란군이 퇴각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공진은 고려 왕이 몸소 친조할 것을 약조하고 이 친조의 약속을 받은 것을 거란족은 침략의 성과로 받아들여 퇴각의 명분을 얻어 1011년 1월 11일 개경 함락 열흘 만에 퇴각을 한다.
다만 이때 하공진은 거란족의 인질이 된다. 또한 거란 여진 몽고 등 유목민족들은 전쟁을 할 수 있는 계절이 정해져 있고 음력 7월 시작해서 1월까지이다. 거란에 끌려간 하공진은 거란족에게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하공진은 고려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다 들키게 되고 국문을 받게 된다.
이런 하공진을 설득해 거란으로 오도록 회유하려했지만 회유되지 않는 하공진에게 분노에 휩싸여 죽이게 된다.
현종의 몽진길
퇴각하는 거란족을 후방에서 공격해서 양규는 2천명의 적의 목을 베고 3만 명의 포로를 되찾는다. 나주에 도착한 현종은 뒤늦게 거란족이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현종은 서두르지 않고 여러지역의 민심을 두루 살피며 갔다. 특히 공주에서는 피난길에 자신을 극진히 모셨던 절도사 김은부 집에 다시 머무르게 되고 김은부의 첫째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그녀가 훗날 현종의 제 3비 원성왕후이다. 심지어 훗날 김은부의 다른 두 딸도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3비로 맞았던 원성왕후는 후에 9대 덕종, 10대 정종의 어머니이자 김은부의 둘째 딸 4비 원혜왕후는 11대 문종의 어머니가 된다.
현종의 몽진길 결혼은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로 태조 왕건의 혼인 정책과 유사하게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결혼을 했고 그때도 지방호족의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현종도 김은부의 세 딸을 포함 13명의 왕비를 얻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지방 세력가의 딸들이었다. 현종은 왕건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나 이후 여러 부인을 두며 다시 고려 왕실의 자손을 다시 번성하게 한 왕이기도 하다.
거란 2차 침입 이후 상황 .
이후 하공진이 약속했던 현종의 친조를 요구하지만 현종은 몸이 아파다고 핑계를 대며 이를 응하지 않는다. 친조는 고려로써는 절대로 지킬수 없는 약속이었다. 국왕이 친조했다가 사로잡히게 되면 다음상황은 국가가 위태로워지는 것이었기때 친조 약조는 거란군을 퇴각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2차 거란 침입 후 고려는 또 다시 송과 교류를 시작한다. 거란에게 종속되는 것을 거부한 고려였다.
[그날 126]
고려 거란 전쟁 : 현종의 몽진길 공주에서 무슨 일이? (고려 역사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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