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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제주 출륙금지령 억압의 땅 역사.. : 제주목_관아 , 관덕정

제주목_관아 

옛날 제주도는 탐라국이라고 해서 원래 독립된 문명으로 존재했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3성의 시조가 나타나 생긴 나라라는 설화가 있다. 통일신라때부터 문화적 교섭이 시작되었고 신라가 탐라를 끌어들이려고 탐라 우두머리에게 성주, 왕자 등의 작위도 주었다. 고려 중기때부터 고려의 행정체계에 탐라가 편입이 되었다. 제주에 지방관을 고려 중앙 정부가 파견하고 제주목이 된 후, 조선 시대까지 유지 되었다. 그래서 제주목 관아는 역사적인 제주 행정의 중심지로 제주목 관아의 옛날 이름은 성주청이었다. 

 

목관아는 지금의 도청이다.
관아 터만 있던 곳을 고증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목 관아 앞에 있는 정자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관아 건물로 1448년 제주 목사 신숙청이 창건 현재 보물 제 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의 남대문 같은 관덕정

 

제주 관덕정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지은 정자이다. 

 

관덕정 안에는 이곳을 칭송하는 호남제일정이라는 글씨가 있다.

 

조선시대 제주는 오랫동안 전라도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호남제일정이라고 했다. 

 

김승훈 목사가 한을 그리워 하며 지은 정자

 

제주 출륙금지령

제주도는 정말 오랫동안 배제되고 억압되었던 땅이다. 국가의 허락 없이는 제주 도민이 제주도 밖에 나갈수가 없었다 .

 

귤림당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던 곳

 

옛날에는 감귤나무는 임금님의 진상품이여서 목 관아에서 와서 귤을 하나하나 세어 표시까지 하며 숫자를 체크했고 혹시라고 하나라도 없어지면 곤장을 맞거나 물어내야 했다. 제주목 백성들은 그 외에도 말, 전복 등을 진상해야 했다. 그만큰 수탈 수준의 진상품으로 고단했던 제주민들이었다. 그래서 제주민들이 너무 살기 힘들어 육지로 이주를 하니 조선 중기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진상품이 적어지고 군인 수가 감소되자 인조 7년 1629년에 제주도에 출륙 금지령을 내린다. 특히 제주의 여성들은 더 엄격히 통제 당했다. 육지에 있는 남성과 결혼도 못하게 했다. 

 

특히 1794년 정조 18년의 흉년은 100녀 년 만의 대재앙으로 시체가 산처럼 쌓일 정도로 제주의 생활은 처참했다. 제주 목사가 한양에 구휼미를 요청하니 다음해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12척을 보냈는데 풍랑으로 5척이 침몰했다.

 

이렇게 조선시대 제주도는 유배, 소외, 차단, 억압, 고립의 지역이었다. 그러다 제주도의 상황이 바뀐 것이 일제 강점기부터이다. 해양 세력이 와서 한반도를 차지하자 해양 세력과 가장 가까운 곳제주도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때 제주 사람들이 생계 유지와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많이 갔다. 그래서 인구 25만 중 5만인 5분의 1 정도가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로 인해 일할수 있는 인력이 없어지면서 제주는 더욱 못살게 된다. 

 

야간통행금지 우선 해지 

또 다른 해양세력이 미국이 전세계를 제패하고 일본 동아시아의 대리인같은 상황이 왔고 제주도는 이제 치안상태가 좋고, 생업인 고기잡이 등 주로 통행 금지 시간에 일해야 하는 제주의 사정으로 1964년 통행 금지가 해제된다. 이때가 일본 관광객이 한국을 찾기 시작한 시점이고 제주도 산업도 1970년대 부터 뱃길도 열리고 배행기도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의 상업적 농업이 발전하게 된다. 1970년대 감귤나무도 열심히 심고 당근, 양파, 무등을 심어서 도시로 팔면서 관광과 농업으로 제주의 경제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연북정 

연북정
아침 저녁으로 임금님의 향해 4번 절하던 곳

 

돌문화공원 

1754년 김몽규 목사가 돌하루방을 만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