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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덕유산 무주 구천동 계곡: 의병장 문태서, 서벽정

무주 구천동 이름 유래

구천동 이름에서 전해오는 신기한 전설이 많다. 조선 중기 임훈 <갈천집> 에는 성불공자 구천 명이 이곳에 은둔했는데 그 스님들이 흘려보낸 쌀뜨물로 아침마다 계곡물이 뿌옇게 흐렸다고 한다.  수련 중인 남편을 찾아 구천동을 떠돌던 한 아내가 남편은 찾지 못하고 첩첩산중 골짜기에서 길만 여러번 잃었다. 그만큼 산과 계곡이 깊다는 곳이다. 

 

 

 

또 다른 얘기는 구씨와 천씨가 많아 마을 이름을 구천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주 구천동 33경 

구천동 명칭의 유래만큼 수많은 절경을 품은 계곡이 많은 곳이고 33개의 절경이 있다. 

 

무주 구천동 33경

덕유산 향적봉은 해발 1614m 로 구천동 계곡 33경 속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의병장 문태서 순국비 

덕유산 무주 구천동 계곡에 문태서 순국비가 있다. 1880~1913 호랑이라 불리던 사람으로 을사조약 이후 의병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13년 순국하기까지 덕유산을 중심으로 호남땅에서 일본군을 떨게 했던 신출귀몰했던 의병장이었다. 

의병대장 문공태서 순국비

 

문태서 별명이 호랑이였던 이유는 체격이 아주 거대했고 용감무쌍했다. 당시 우국지사 최익현을 만나 호남 의병대를 창의한 후 호남창의 대장으로 박춘실과 함께 500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활동했던 의병이었다. 원래 호남 의병이 창의를 한 곳은 진안 마이산이었으나 주요 활동지가 덕유산이었다.  덕유산이라는 이름이 사람을 보호해준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등의 난이 있을때 마다 사람들이 들어와 몸을 의지했던 산이다. 

 

덕유산 뜻

덕유산은 계곡을 따라 넓고 큰 바위가 많아 구천동 계곡 바위 사이에 숨어서 의병들이 싸우기에 적합했다. 

 

무주 구천동 11경 송병선의 서벽정

송병선은 (1836~1905년 ) 조선 후기 유학자 송시열의 9대 후손으로 위정척사파 선비였다. 개화를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선비로 무주 구천동에 서벽정이라는 집을 지었다. 

 

전북 기념물 제 80호

 

 

서벽정의 의미는 푸른 산에 왜 홀로 와 있는가? 라는 의미로 송병선의 고향이 무주는 아니다. 무주는 충청, 경상 전라도가 만나는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해서 삼도의 훌륭한 유생과 학생을 교육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이곳에 인재를 양성했다. 

 

서벽정

 

구천동 33경 중 경치 좋은 9개를 뽑아 무계구곡이라 이름을 지은 것도 송병선이었다. 진안에도 최익현과 송병선 선생의 흔적이 있다.  당시 유명한 호남 의병의 거두가 면암 최익현 선생과 송병선 선생이었는데 그분의 제자들이 모여 호남 의병 창의를 위해 모였고 그래서 송병선의 흔적이 진안에도 있다. 

 

 

 

나라를 잃은 학자가 할수 있던 일은 전국을 떠돌며 후학을 양성해 나라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을사조약에 항거하기 위해 70세가 넘는 나이에 고종을 찾아갔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뜻을 이루지 못함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