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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부산 제한유엔기념공원 : UN 공원 속 참전국 이야기 유엔기념공원 7월 27일은 UN군 참전의 날로 우리나라에서 지정되어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유엔군의 희생과 봉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50년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로 인해 UN군 사상자가 늘며 유해 안장할 곳이 필요했고 제한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1월 6.25 전쟁 전사자 매장을 위해 UN군 사령부가 조성한 곳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장병들의 유해를 모아 안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일의 UN군 묘역으로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11개국 2327명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휴전 후 1955년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UN군에 영구 기증하기로 결정한다.   UN 묘역이 부산에 조성된 이유는 부산국제영화를 하던.. 더보기
휴전회담 쟁점 포로 송환 무엇이 문제였나? 포로 송환 문제 정전 협상의 최대 쟁점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그 이유는 포로의 숫자에 큰 차이가 있었다. 공산군 측의 유엔군 포로는 약 1만 2천명 정도였고 UN측의 공산군 포로는 약 13만명이었다. 약 10배 차이였다. 그러나 문제는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에 북한군과 중국군만 있으면 문제가 없었으나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이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징용을 당한 남한의 국민들이 북한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 동원된 남한 국민을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로 구성의 차이와 숫자의 차이로 인해 무려 1년 반이나 대립한 포로 송환문제가 계속되었다. 자동 송환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유송환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자동송환: 국적에 따라 당사국으로 바로 송환 *자유송환: .. 더보기
연천 경순왕릉 : 신라의 마지막 왕은 왜 이곳에 묻혔나? 10세기 후반 978년 신라 56대 임금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의 계속된 침공에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내어준다. 그리고 경순왕은 개경에서 눈을 감는다. 경순왕의 관은 조상들이 묻힌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왕실은 왕의 무덤은 수도에서 백리밖에 두지 못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운구를 멈추게 했다. 고려는 신라 유민들의 봉기를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경순왕은 결국 고랑포 신라 국경을 눈 앞에서 두고 개경에서 80리 거리 북쪽 언덕에 묻히게 된다. 경주 밖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야산에 버려졌던 경순왕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라진다. 그러다 조선 영조때 1746년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지만 또 다시 잊혀진다. 그러곧 한참 뒤 1970년대 들어서야 총탄 가득한 경순왕.. 더보기
김유신 : 삼국통일 진실은? 계획에 없었다 ?! 천년 신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 경상북도 경주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곳곳에 신라 1000년의 역사와 보물이 숨어 있다. 김유신 이야기 경주 송화산 초입 화려한 무덤 하나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 장군이다. 1970년 남북이 분단되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대통령 박정희는 북쪽을 바라보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경주 황성공원에 세웠다. 김유신은 그 예전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되었고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가 열전으로 3권이 있다. 그러나 김유신은 경주 사람(경주 김씨)이 아니다. 신라가 멸망시킨 가야의 후손 김해 김씨이다. 또한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진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유신은 부모님이 거처를.. 더보기
허준 무덤 이곳에? : 허가바위에서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집필까지.. 허준 무덤 임진왜란때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다. 이때 모두 86명이 따라갔는데 내시가 24명, 마구간 지기 6명, 의관이 2명, 별좌와 사알(심부름꾼)이 2명이였다는 기록이다. 이때 의관 2명중 한 사람이 허준이었다. 그는 선조를 수행했던 왕실 주치의였다. 이곳에는 세 개의 묘가 있다. 부인 안동 김씨, 허준 어머니 , 허준이렇게 세 사람의 묘로 추정된다.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가 양천 허씨 족보를 바탕으로 하포리를 뒤져서 허준과 관련된 비석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전남 진주박물관에 있는 태평회맹도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잘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호성공신이라는 훈장을 하사하 임금이 선물한 그림이다. 호성공신 양평군 허준이라고 적혀있다. 허준은 죽어서 양평군이라는 직위를 받게 .. 더보기
고랑포, 호로고루 이곳 어디? 고랑포 임진강에서 가장 폭이 좁고 얕은 고랑포는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고랑포에서 결정될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2002년 남북평화협력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에서 제작해 한국에서 전시된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릉비를 고구려 유적지 고랑포에 세웠다. 호로고루 임진강 남쪽 절벽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로고루가 있는 이곳은 옛날 1500년전 삼국시대에 치열한 전쟁터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전쟁을 벌였던 곳이다. 호로고루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피비린대 나는 전쟁을 벌었다. 보리밭 언덕 넘어 흐르는 강이 임진강인데 그 임진강을 옛날 사람들은 '호로하' 라고 불렀고 그 언덕 위에 있던 요새를 호로고루라고 부른다. 5세기 장수왕 시대 고랑포를 건넌 고구려 군이 세운 성채이지만 높지는 .. 더보기
창덕궁 이야기 1997년 12월 창덕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서울 5대 궁궐 중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고 볼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이지만 현재의 창덕궁은 동궐도와 비교해 보면 옛 모습의 20% 정도이다.    1395년 경복궁이 가장 먼저 세워지고 태종때 창덕궁이 만들어진다. 성종때는 왕실에 대비들이 많아서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선조가 갔다왔다는데 3개의 궁궐이 모두 소실되어 임시로 정릉동 행궁에 모셨는데 이것이 궁궐로 발전하면서 경운궁이 되었다. 나중에 고종 황제가 이곳에 계속 거처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이 새로운 궁궐을 짓고 싶어했고 그렇게 해서 지은 궁이 경덕궁인데 영조.. 더보기
가야 시조 탄생 설화 및 나라를 넘긴 마지막 왕 이야기 가야국 시조 탄생 설화 가야 왕국의 시조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등장하는 구지가는 일연의 에 기록된 가야 시조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김해땅, 구지봉 산 아래 살던 아홉 족장들은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따라 구지가를 부르니 하늘에서 황금 상자가 내려오고 그 속에 알 여섯개가 들어있다.   이후 알에서 깨어난 사내아이 6명이 후에  여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됐다. 그 중에서도 가야 연맹국의 중심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왕이다.   가야의 마지막 왕은 누구? 그러나 주변 열강의 침입으로 약 500년의 역사를 끝으로 신라에 금관가야는 멸망하게 된다.  서기 532년 신라와 금관 가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금관가야 구형왕이 나라를 통째로 신라에 넘긴다.   가락국은 고대 국가 .. 더보기
합천 함벽루 : 대야성 전투 김춘추 복수극의 시작.. 합천 함벽루 경상남도 합천 황강벽에는 함벽루가 있다. 합천하면 해인사를 많이 떠올리지만 합천에는 다른 볼거리도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함벽루인데 이 작은 정자에 많은 문인이 찾아와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 남명 조식 (1501~1572) , 퇴계 이황이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또한 구한말 의병장 이범직 또한 자신의 글을 이곳에 남겼다.     조선 중기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로 이 세사람을 빼고는 성리학, 정치, 유학을 논할수 없는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이다.   을사늑약 당시 황제 고종을 윽발질러 나라를 팔아먹는데 도장을 찍게 만든 을사오적 중의 한 사람 이은용(이지용)의 이름도 커다랐게 새겨져 있다.     대야성 위치, 흔적들7세기 초 신라와.. 더보기
고려청자 : 일본인만 알아본 강진 도자기.. 강진 고려청자 2007년 5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된다. 58살 어부 김용철이 바다에 던진 주꾸미 통발에 주꾸미 한 마리가 걸려 올려졌다. 그런데 그 주꾸미의 빨판에 파란색 대접하나가 딸려온 것이다. 무려 12세기의 2만 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싣고 가던 보물선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고려청자가 한꺼번에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고려청자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였던 것은 목간이었다. 이 목간에는 탐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이 배는 탐진에서 출발해 고려 수도 개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 목간 덕분에 강진산 고려청자의 명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강진은 청자 생산에 알맞은 조건인 품질 좋은 흙과 풍부한 뗄감 그리고 강진만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