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의 터를 선택할 때 기준?
명릉도는 숙종과 인현왕후 , 인원왕후의 능을 나타낸 그림인데 산맥과 물줄기가 좌오로 감싸고 있는 지형에 왕릉을 조성한다.
풍수지리학자가 볼때 최고의 능은 세종의 영릉, 세조의 광릉, 인조의 장릉 등이 있다. 세종대왕 묘 영릉은 회룡고조 형으로 앞쪽에 조산을 바라보고 능선이 무덤을 감싼 ,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 형국이다.
왕릉 주변의 조형물들 의미?
무이석, 문인석은 무신과 문신을 의미하고 동물상으로는 양과 호랑이가 있는데 능을 보고하고 악귀 및 맹수를 내쫓는 역할을 한다.
특히 조선왕릉의 경우 석호에 주목해야 한다. 호랑이는 일반적으로 싸울때 앞다리와 꼬리로 싸운다. 호랑이를 보면 얼굴은 웃고 있는데 앞다리는 날카롭게 조각되어 있다. 꼬리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대대로 우리민족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지형에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풍수가 특정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닌 포근한 느낌을 주는 지형을 찾는 것이 풍수의 목적이다.
조선왕릉 풍수
울창한 숲
유네스코에서 조선왕릉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는 약 570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숲을 주목했다. 이 넓은 숲에 왕과 왕비의 무덤만 있는 것이다. 세조는 유언으로 "왕릉 주변에 온갖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라" 고 했다. 그래서 500년 역사를 간직한 울창한 숲 속의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이 된 것이다.
자연친화적 요소
단릉, 쌍릉, 동원이강릉 등 자연 지형에 맞게 다야한 형태로 능을 조성했다.
->왕릉 종류 (단릉,쌍릉,동원이강릉,합장릉,동원상하릉)
또 다른 명당 태실
사실 왕릉보다 더 좋은 명당으로 생각했던 곳은 왕자와 공주의 태를 묻은 태실 자리였다. 갓난 아기의 태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끈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태를 명당에 보관해야 가문을 일으키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기의 태를 담은 태항아리를 묻어 둔 태봉이 여러곳에 있다.
태실이 특이한 모양이 있는데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 것이 있는데 왕자가 왕이 되면 가봉이라고 해서 석물을 더 화려하게 조성을 한다.
한 일화로 이곳에 왕자들의 태실이 묻어있으나 조선시대 이문건이라는 학자가 자신의 손자 태를 몰래 묻었다. 당시 왕릉이나 태봉으로 지정이 되면 금표를 설치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가로, 세로 100m 지역내 모든 땅을 쓸수 없게 금지시켰고 일반인들의 무덤 조성, 벌목, 경작 등의 일체 행위가 금지되어 철저히 보호했다. 이를 어기고 금표 내에 묘를 쓰는 자는 사형이었다.
광릉 수목원, 홍릉 수목원 같은 곳이 있는데 전형적인 조선시대 판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조선 왕릉이 도성 근처에 형성된 이유는?
왕릉은 풍수적으로 명당인 자리에 한강을 따라 참배에 용이하도록 도성 근처에 형성되었다. 하루 안에 참배를 다녀올수 있는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고양시에 주로 조선 왕릉이 조성되어 있다. 한강 남쪽엔 왕릉이 드문 이유는 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능도 한강 넘어 위치해 있어 수천명이 이동하기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배다라를 만들어 참배에 용이하게 했던 것이다.
조선왕릉 중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왕릉은 강원도 영월의 단종 장릉이다.
● 중종이 정릉에 묻힌 이유: 시호, 묘호, 능호 차이점 및 의미 (33)
정조 융릉(사도세자), 원릉(영조) 조성 이유 ,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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