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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학도병 이야기 : 포항여중 전투 의의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이 함락 되고 더욱 거세진 북한의 공세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때 마지막 방어선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군번도 없던 학도병이었다. 학도병의 공식 명칭은 학도 의용군이다. 한국 전쟁 발발 3일 후 6월 28일 수원에서 구국 비상학도대를 조직했고 29일 바로 한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된 기록이 있다. 

 

서울 소재 학생들이 용산고에 집합한 모습 

학도의용군이란? 

학도의용군이라는 말 자체가 전쟁 중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조직되는 무력집단이라는 뜻으로 전시에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자원한 학생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원래 징집 대상 연령은 18세 이상으로 학생은 징집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전시가 되니 학생들이 나라의 위험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 개별적으로 입대한 것으로 학생들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군번도 지급되지 않았다. 비정규군이기 때문에 군수 물자만 지급이 가능했다. 

 

학도 의용군 신분증

 

학도병에게 신분증은 있었으나 잃어버리거나 훼손되기 쉬워서 전사 후에도 신원 파악이 어려웠던 이들이다. 당시 전쟁 발발 이후 전투병만 약 27,700명이 학생 신분으로 참전했고 행정, 보급, 의료, 파란민 구호, 전황 보도나 가두선정 등의 활동의 선무공작 등 전투 외에도 동원된 학도병까지 약 20만 명이 군을 도와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포항여중 전투 전개 상황

당시 낙동강 전선 방어의 중요 거점이 포항여중이었는데 1950년 8월 11일에 이곳에 전투가 있었다 . 

 

영화 <포화 속으로>  의 한 장면

 

학도병 71 명이 11시간 30분동안  백병전까지 치른 전투로 1950년 8월 초 북한군 제 5사단이 영덕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 중이었고 8월 9일 경북 영덕군 강구를 점령한다. 이 일대를 점령당하게 되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전쟁이 힘들어질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주공 사단은 12사단과 5사단이 포항 일대를 집중공격하고 있었고 국군 3사단 사단장 김석원이 당시 모인 학도병 87명에게 집에 가도 좋다고 했으나 자리를 지킨 71명이 남았고 이들에게 M1 소총과 인당 실탄 250발을 보급했다. 

 

 

 

포항여중 전투가 8월 11일이었는데 하루 전 8월 10일에 전투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도착한 인민군이 보기에 모두 학생들 같아 투항을 권유했으나 단 한 명도 투항하지 않았고 오후 1시쯤 전투가 전개된지 9시간 정도 흐르고 나니 남아 있는 탄환이 없었다. 학도병들은 완벽하게 고립무원이 되었다. 이에 최후의 방법인 총검술,  백병전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포항여중 전투 71명 학도의용군 중 전사자는 48명, 실종자 4명, 부상자 6명 , 13명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중 11명은 탈출을 했으나 2명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11시간 반 동안 이어진 4차례의 파상 공세로 국군 제 34사단 후방지휘소와 포항은 결국 북한군이 점령한다. 

 

포항여중 전투 의의, 가치 

포항여중 전투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는 정비된 군대의 작전 준비 시간을 확보할수 있었고 포항 시민과 피란민 등 약 20만여 명이 형산강을 넘어서 남하할수 있었다. 8월 14일 북한군이 점령했던 포항을 다시 국군이 수복하게 된다. 

 

2011년 강원도 철원군 육군 제3보병사단은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 5명에게 명예 군번을 수여하였다. 학도병이 군번을 수여받은 일은 우리 군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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