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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한미동맹 상징 카투사 역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배경 중요성

한미상호방위조약 배경 

연합군은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이며 6.25 전쟁을 끝내는 듯 했으나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정전 협상이 진행된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반대 의사를 밝히고 1951년 7월 1일이 국민들의 정전 반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런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정전 회담이 시작된다. 그러나 좁혀지지 않는 의견으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38선을 중심으로 고지전에 돌입한다. 

 

정전협정 제안 

전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하는 정전 협정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정전협상 회담이 개최된 이후 무려 2년간 이어진다. 막대한 전쟁 비용, 군사 병력 소모 등 그 누구도 한반도를 온전히 차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 유엔측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했다. 1951년부터 시작된 본 회담은 무려 159회였고 다른 작은 회의까지 합하면 총 756회의 회담이 진행되었었고 장장 2년 17일 만에 정전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고지전이 정전협상 중에도 계속된 이유 (영화 고지전 배경과 감상포인트)

 

고지전이 정전협상 중에도 계속된 이유 (영화 고지전 배경과 감상포인트)

고지전 감독 장훈 /2011년 개봉 6.25전쟁 휴전 협상의 난항속에서 동부전선최전방 '애록고지'를 사수하기 위한 처절한 전투극으로 영화의 마지막 전투는 실제 425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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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회담 쟁점 포로 송환 무엇이 문제였나?

포로 송환 문제 정전 협상의 최대 쟁점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그 이유는 포로의 숫자에 큰 차이가 있었다. 공산군 측의 유엔군 포로는 약 1만 2천명 정도였고 UN측의 공산군 포로는 약 13만명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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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 

전쟁 포로의 문제로 진전이 없던 정전 협정에 북한의 재침에 대비한 강령한 군사 동맹을 미국에 요구했고 한편 미국은 정전을 강제하려 했다.이승만 대통령은 애초에 북진통일을 외쳤던 사람이고 1차적으로 남한의 자유정부를 세우길 원했었고 2차적으로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국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이나 유엔군이 빠지면 국군만으로도 북진을 하겠다고 주장했고 미국 외교부, 대사, 군사 지휘관과 충돌 중이었다. 트루먼 대통령 시절 이승만은 서한을 보냈는데  정전 협정을 하려면 미국이 한국에 남아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는 방법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보호, 군대 증강, 경제 원조 등을 제시했으나 미국 대통령이 바뀌게 되고 다시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협상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핵심 주장은 90일이내 문제 해결이 안되면 미군은 국군과 함꼐 북진해야 한다는 것과 일본의 동맹에 준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했던 것이다. 

 

반공 포로 석방 사건 

미국이 정전 협정을 강제하려고 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유엔군이 관리하던 수많은 반공 포로 수용소들,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등에 들어가 강제로 2만 7000여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남한에 수용된 북.중 출신 반공 성향 포로를 석방한 사건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 사건으로 1953년 6월 25일 2주 동안 협상을 시도하다가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으로 한국이 방위를 위하여 외국과 맺은 최초이자 유일한 군사 동맹 조약으로 미국과 이승망 정부의 합의로 북진을 포기하고 그에 준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남한의 방위를 보장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독자적으로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령은 큰 성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때 맺은 동맹 조약은 어디에서도 유례없이 71년간 이어졌다. 

 

한미동맹의 중요성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도 가난했지만 전쟁까지 발발해 폐허 그 자체였다. 당시 한국 마을 총 5000여 개로 추정되는데 그중 1200여 곳이 폐허가 되었고 한국 제조업의 약 42%가 파괴되었다. 철도, 항만, 학교등 사회기반시설이 대부분 붕괴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액이 약 4123억원으로 당시 연간 국민 총생산액의 두 배였다. 많은 국가에서 한국이 다시는 못 일어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위기에 더욱 강한 민족이라는 말이 있듯이 포기하지 않고 재건에 집중했다. 전쟁 후 급성장한 대한민국의 배경에서는 한미동맹이 큰 역할을 했다. 한미 동맹의 근거가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긴장된 남북 관계 속 전쟁 억제력을 확보했고 안보가 강화된 장점을 누려왔다. 보통 국제 정치사회에서 군사동맹의 평균 수명은 9년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은 70년이 넘어가고 있다. 

 

한미동맹의 효과는 국방비 절약에 큰 몫을 했다. 한국은 GDP 대비해서 2.7%로 사실상 국가가 처한 분단상황이나 여러가지 요소를 생각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국방비가 지출되어야 하지만 한미동맹으로 비용을 많이 경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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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위상

한미동맹의 위상은 높인 전쟁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당시 미군과 함께 싸워 동맹국의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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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한미동맹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아직도 주적이 남아있고 국제 사회 패권 경쟁에 대한민국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미동맹 체결에 대한 시선 

한미동맹을 체결한 이후 미국이나 다른 나라가 바라보는 시선은 가장 성공적인 동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신생국 중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경제발전을 이루고 선진국으로 거듭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기 때문에 미국이 맺은 국제 동맹 중 가장 성공적인 예시가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던 많은 군인들이 지켜낸 나라가 이렇게 성장한 것을 보고 눈물흘린다. 이런 참전용사의 눈물이 한미동맹의 성과를 증명하는 것이다.  

 

 

 

카투사 (=KATUSA) 란?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의 약자로 카투사는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한국 육군 병력으로 한미 연합관련 일을 하고 있다. 

 

카투사 역사 

카투사는 주둔국의 병력이 미군의 지휘체계에 밑에서 근무하는 형태 전 세계에서 유일한 근무방식이다. 실제 전쟁이 생겼을때 카투사의 역할은 전쟁 당시 아군과 적군의 피아식별(누가누구인지 아군,적군,민간인, 사투리 등등) 이 어려웠던 미군이었다. 이에 한국어 구사 능력이 필요해 카투사를 창설한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그 이후 원산 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다부동 전투에서 중요한 활약을 했다. 카투사의 다양한 활약으로 현재 한미동맹의 상징이 되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카투사를 잊지 않고 기념한 장소가 있다.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과 카투사를 포함한 4만여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이 추모의 벽은 백악관에서 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추모의 벽

 

이 추모의 벽 한쪽 켠에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인 이름이 있는데 한국전쟁때 카투사로 참전했던 7174명의 이름이다. 

 

7174명의 카투사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