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이스라엘은 불과 50년전만 하더라고 상당한 우호국이였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에 아랍국가들과 전쟁을 치르며 많은 배척을 받았다. 이때 이스라엘에게 손을 잡아준 나라가 이란이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당시 아랍계인 팔레스타인사람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아랍 국가가 격렬히 반대를 한다. 결국 이스라엘 건국 선포 다음날인 5월15일 총 7개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ㅅ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이때 손을 내밀어준 나라가 이란이었다. 이란은 튀르키예에 이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두번째 나라이다. 이후에도 우호의 상징으로 테헤란에 이스라엘 대사관 설립했다. 당시 이란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근대화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백색 혁명을 통해 여성들의 히잡 착용 절감 미니스커트 허용등 이란은 자유로운 사회로 개혁해 나가고 있었다.
->히잡 역사 78-2 (백색 혁명 - 히잡의 자율화 )
당시 이란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건국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이란과 이스라엘은 외교관계를 쌓고 있었다. 당시 미국이 우호의 상징으로 이란에게 F-14 톰캣이라 불리는 전투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1956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2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이란에게 경제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란와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직접 석유를 공급받기 힘든 상황이었고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트랜스- 이스라엘 파이프라인이다. 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안정적으로 석유를 공급받았고 두 나라는 단단한 경제 공동체로 맺어지게 된다.
이란도 이스라엘을 통해 유럽으로 통하는 바닷길을 확보하면 이집트의 지불했던 수에즈 운하 이용료를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트랜스 -이스라엘 파이프라인은 이란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윈윈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또한 이 두나라는 군사적으로도 미국 지원하에 중동 내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자랑했던 이스라엘이었다. 또한 1960 년대부터 핵기술을 개발해서 중동 유일의 핵개발국가였다.
인도 파키스탄 등 주변국들이 군비증강에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란은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란은 이스라엘과 비밀리에 군사협정을 맺는다. 1977년 1월 프로젝트 플라워로 첨단이스라엘 시스템을 함께 개발하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합동군사훈련이었다. 더 강력한 미사일 개발을 위해 두 나라는 각국의 자원을 은밀하게 거래한다
이렇게 우호관계였던 이란과 이스라엘을 적대국으로 돌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었다. 그 이유를 아래에서 확인해보자. 👇
중동 석유파동 이슬람 혁명 영향 (걸프전쟁 전 미국 중동문제 개입과정)
[E.24-1 서강대 이슬람학 교수 박현도] 1908년는 중동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바로 이 해에 이란의 마스제드 솔레이만에서 석유가 발견된다. 지상 15M로 솟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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