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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경주 최부자집 최진립 장군 - 독립운동가 최준까지 400년 역사..대구대는 왜 영남대가 되었나?

최부잣집 

경주는 동학의 발원지로 최진립 장군은 두 번의 국란에 모두 참가한 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때는 권율과 함께 울산 서생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최진립의 시조는 신라 문장가 최치원 선생으로 경주 최씨의 시조격이다. 사실 경주 최부자집은 지금도 유명하다. 12대에 걸쳐 400년간 부와 명예를 지킨 명가이다.

 

최진립 장군은 누구?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는 용산서원이 있다. 최부자집의 중시조격인 최진립 장군을 모신 서원이다. 무신으로서 향사된 경주는 극히 드물어 이순신 장군 이외에는 없다.  최진립은 1568년 무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진립은 신라 최치원의 17대 손
최진립 장군 기념비

 

최진립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 25세의 나이에 의병을 이끌고 싸웠으며 69세에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됐다는 소식을 들은 최진립 장군은 예순아홉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여 용인의 험천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시신을 찾았는데 화살을 온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고 얼굴은 살아 있는 듯 했다고 한다. 

 

충의비각

 

임진왜란, 44년 후 병자호란이 발생했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번을 참전한 극히 드문 장군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1740년 경주에 충의비각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최진립을 영원히 제사를 지내는 불천의로 지정하고 역대 국왕들은 4번이나 사액제문을 보냈고 후손들은 수백년째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의당 최진립 장군의 생가

 

최부잣집 노비 제사 지내는 이유 

병자호란 당시 최진립 장군은 죽을 각오로 출정을 했고 이때 노비 두 명을 데려갔는데 자신의 죽음을 집안에 알리라고 전쟁 중 돌려 보냈으나 이 노비 두명도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 라고 같이 싸우다가 노비 둘다 죽었다. 이들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최진립 장군의 집안에서는 노비 두 사람의 제사도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옥독와 기별의 충의각

 

조선시대 양반들이 노비를 제사를 지낸다고 흉을 봤지만 집 뒤에 두 노비의 비석을 세우고 현재까지 그들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 

두 노비 옥동과 기별

 

최부잣집 어떻게 재산을 축척했나? 

최부자집이 부를 축척한 계기는 씨앗을 모판에 심어서 기르다 논으로 옮겨와 심는 방법인 이앙법 (모내기) 을 하면서 모를 키우는 동안 다른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이모작으로 수익이 증대되었다.  또한 당시 소작농에게 5:5의 비율로 수익을 지급했더니 오히려 더욱 수가 증가되었다. 

 

독립유공자이자 마지막 최부자 최준 (28대손)

 

나라가 망했고 12대 최부자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 광복회의 단원이었고 이 단체에 자금을 제공, 이로 인해 1917년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소했다. 이후 무역업체로 위장한 백산상회의 사장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제공했다. 그의 두 동생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대구대->영남대 되기까지 

수많은 동지들과 친동생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지켜봤던 최준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해방된 조국을 반드시 튼튼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의 재산이 의미있게 쓰일 방법으로 전재산을 육영사업에 쓰기로 한 것이다. 미래를 위해 후손을 기르는 것이 만석군의 재산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그렇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학교 설립을 위해 사용했다. 

지금의 영남대 의대 자리에 대구대 설립

 

지금의 영남대 의대가 있던 곳에 사립대 대구대를 설립하고 최준은 재단 이사가 되어 육영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 후 대학 설치령 강화로 인해 운영난에 빠져 대가 없이 1964년 호암 이병철에게 넘겨주게 되지만 1967년 이병철도   대구대학 운영을 하지 못하게 되고 대구대는 청구대와 합병되어 영남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학교 운영권이 박정희 일가로 넘어가버린다. 1970년 최준은 사망하고 최준의 죽음과 함께 경주 최씨 최부자집도 역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