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한국 땅을 점령한 적이 있다?"
1885년, 조선 남해안에 있는 거문도(巨文島)가 영국에 의해 무려 2년 동안 불법 점령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조선이 국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왜 갑자기 거문도를 점령했을까? 그리고 조선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1. 거문도 사건이 일어난 배경
유럽부터 아시아까지 넓게 펼쳐진 러시아는 당시 전 세계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라이벌 관계였다. 영국은 러시아가 한반도를 진출한다면 한반도를 거점 삼아 중국과 일본까지 점령하면 동아시아가 러시아 것이 될 것을 우려한다. 이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령한다. 열강들의 전쟁터가 되어 가는 한반도였다.
①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영국의 견제
- 19세기 후반, 러시아는 **따뜻한 항구(부동항)**를 확보하기 위해 남하 정책을 펼침.
- 러시아는 한반도와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조선이 약한 상황을 이용해 부산, 원산 등에 진출하려 함.
-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막으려 함.
- 조선은 아무런 힘도 없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② 조선이 청나라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불안정한 상황
- 당시 조선은 청나라(청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강대국들의 개입을 막을 힘이 없었음.
- 영국은 청나라가 조선을 확실하게 보호하지 못한다고 판단, 직접 조선을 견제하려 함.
③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이후 국제 정세 변화
-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정세가 더욱 불안정해짐.
- 청나라가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면서, 이에 반발한 조선 정부 일부는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임.
-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자, 러시아를 새로운 외교적 대안으로 삼으려는 흐름이 나타남.
-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으로 남하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개입을 고려하기 시작함.
④ 조선의 중립론 대두
- 거문도 사건이 벌어질 즈음, 조선 내부에서는 중립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 강대국들 사이에서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지 말고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음.
- 그러나 정부 내부에서는 친러, 친일, 친청 등 다양한 외교 노선을 주장하는 세력이 대립하며 하나의 명확한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 이러한 혼란 속에서 조선은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더욱 심각한 외교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2. 영국의 거문도 점령 (1885년 4월 15일)
📌 ① 영국 해군, 거문도를 기습 점령
- 1885년 4월 15일, 영국 해군이 조선 정부에 통보도 없이 거문도를 점령함.
- 영국은 전함 3척을 보내 거문도를 군사기지처럼 만들었고, 2년 동안 머무름.
- 조선 정부는 영국이 왜 갑자기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당황.
📌 ② 영국의 공식 입장: "우리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했다고 주장.
- 그러나 조선은 **"우리는 러시아와 아무런 협상도 한 적이 없다!"**며 반박했지만, 힘이 없었음.
📌 ③ 거문도를 차지한 영국이 한 일
- 거문도에 군사 시설을 설치하고, 영국 군대를 주둔시킴.
- 조선 정부는 영국군을 내보내려고 했지만, 당시 청나라의 개입이 필요했음.
- 청나라가 영국과 외교적으로 협상하기 시작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함.
3. 거문도 사건 해결 과정 (1887년 2월 철수)
① 청나라의 외교적 개입
-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
- 청나라 외교관 **이홍장(李鴻章)**이 직접 영국과 협상을 진행함.
- 청나라는 영국에게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할 가능성은 없다"**고 설득하며 거문도 점령의 명분이 사라지도록 함.
② 영국, 국제적 압박으로 철수 결정
- 조선을 점령한 영국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특히 청나라와 프랑스의 반발)이 커짐.
- 영국은 러시아가 실제로 조선을 차지할 계획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1887년 2월 거문도에서 철수.
- 영국군이 떠난 후, 조선은 다시 거문도를 회복했지만, 국제적 위기 속에서 무력함을 경험함.
📌 정리:
✅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이유 →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 조선은 어떻게 대응했나? → 청나라를 통해 외교적으로 해결
✅ 결과 → 1887년 영국 철수, 조선은 다시 거문도를 되찾음
✔️거문도 사건이 남긴 영향
① 조선의 국제적 위기감 심화
- 거문도 사건을 통해 조선은 **"우리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너무나 힘이 없는 존재"**라는 현실을 깨달음.
- 이후 조선 정부는 **"더 이상 청나라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짐.
② 조선의 개혁 필요성이 커짐
- 고종은 거문도 사건 이후 서구 문물 도입과 개혁(근대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낌.
- 이후 1880년대 후반 개화정책(전신·철도·군대 개혁 등)이 적극 추진됨.
③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개입이 더 심해짐
-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다시 조선에 대한 관심을 키움.
- 일본 역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개입.
- 결국 1894년 청일전쟁(조선 지배권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거쳐, 조선은 일본의 손에 넘어가게 됨.
✔️결론: 거문도 사건은 조선이 무력한 상태였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영국이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 것은, 조선이 국제적으로 얼마나 힘없는 존재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 조선은 러시아·영국·청나라 사이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외교적으로도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 이 사건 이후 조선에서는 근대화를 통한 자강(自强)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었지만,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을 피하지 못했다.
👉 "거문도 사건은 단순한 점령 사건이 아니라, 조선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흔들렸던 대표적인 국제 외교 사건이었다!" 📜🌏
그때 나왔던 것이 중립론이었다. 열강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정부의 일부는 친러, 누구는 친일, 누구는 친청등 의견이 갈리는 대신들로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가운데 대한제국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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