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Here 썸네일형 리스트형 두향지묘 : 이황과 두향의 사랑이야기 모두 거짓? !! 소백산과 남한강이 만나서 생긴 충북 단양의 청풍호에는 조선 시대 10대 명기 중의 한 분이자 단양의 관기 기생 두향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두향이라는 기생은 빼어난 용모와 거문고와 시에 능했던 기생으로 그녀가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 퇴계 이황이다. 1548년 단양 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28살의 나이차에도 단양 관기 두향을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1년도 되지 않아 풍기 군수로 이황은 떠나야 했다. 상심한 두향은 기생을 그만두고 강선대에 움막을 짓고 홀로 지낸다. 22년 후 세상을 떠나기 전 이황의 마지막 유언이 이러했다. 상심한 두향은 강선대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다. 그렇다고 두향이라는 기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 임방의 수촌집에 두.. 더보기 무주 적상산 사고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경기전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외사고 실록의 보관소가 있던 곳이다. 경기전에 딸려 있는 작은 건물 실록각이다. 조선 초기 춘추관과 충주에 보관된 2부의 실록각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총 네 군데에 실록을 보관한다. 이 실록은 읍성 도시 한가운데 보관되었고 보안은 물론 화재의 위험도 컸다. 실제로 성주사고에서는 사람들이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불을 피우다 사고가 홀딱 타기도 했다. 130년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이 북상한 순서대로 사고들이 불타 버린다. 성주, 충주, 춘추관사고에 불이났고 정유재란때는 이곳 전주사고까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실록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1592년 4월.. 더보기 태백 이야기: 황지 연못 (낙동강 발원지), 탄광 개발 역사/자미갱 함백탄광 사고 하늘 아래 첫 동내 태백에 가면 대한민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름을 쓰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정류장을 세울 당시 아무것도 없어서 집주인 이름을 붙인 정류장이 탄생한 것이다. 태백 황지 낙동강 발원지 태백 시내 한가운데 영하 18가 되도 얼지 않는 연못, 황지연못이 있다. 이곳은 하루 5000톤 넘는 물이 솟고 연중 수온은 영상 15도 일정한 샘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늘 넘친다. 그 물이 흘러흘러 남쪽 바다, 남해로 흘러가 1300리 낙동강의 발원지가 황지이다. 연못 밑에 용궁이 있는데 가끔 용이 몸을 흔들어서 바닥 청소를 하면 물거품이 솟구쳐 연못이 누렇게 된다고 한다. 태백한 아래 황지는 예로부터 유명했다. 또 다른 전설 옛날에 이 연못가에 심보 고약한 황 부자가 살았는데 스님.. 더보기 태백 검룡소 : 한강의 발원지가 아니다? ! 삼수령 자동차가 넘을 수 있는 고개 중 2번째로 높은 두문동재는 첩첩산중으로 이곳 고갯길 피재를 지나면 태백으로 올수 있다. 피재라는 이름은 옛날 전쟁을 피해 이곳에 사람들이 왔다고 해서 피재이다. 현재 피재는 삼수령이라고 부른다. 환란을 피해 온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다. 피재에 비가 오면 어떤 빗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면 한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내리면 낙동강, 동쪽으로 흘러내리면 오십천이 된다. 이 피재 고개 위로흘러내리는 빗물이 세 갈래로 나누어지면서 삼수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예로부터 물이 흐르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나라가 세워졌다. 태백 검룡소 금대봉 자락 해발 954m 산중턱에서 솟는 작은 샘은 사시사철 얼지도 않는 연못이 있다. 겨울 금대봉 눈길을 20여 분 올라오면 물소리가 들.. 더보기 덕유산 무주 구천동 계곡: 의병장 문태서, 서벽정 무주 구천동 이름 유래 구천동 이름에서 전해오는 신기한 전설이 많다. 조선 중기 임훈 에는 성불공자 구천 명이 이곳에 은둔했는데 그 스님들이 흘려보낸 쌀뜨물로 아침마다 계곡물이 뿌옇게 흐렸다고 한다. 수련 중인 남편을 찾아 구천동을 떠돌던 한 아내가 남편은 찾지 못하고 첩첩산중 골짜기에서 길만 여러번 잃었다. 그만큼 산과 계곡이 깊다는 곳이다. 또 다른 얘기는 구씨와 천씨가 많아 마을 이름을 구천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주 구천동 33경 구천동 명칭의 유래만큼 수많은 절경을 품은 계곡이 많은 곳이고 33개의 절경이 있다. 덕유산 향적봉은 해발 1614m 로 구천동 계곡 33경 속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의병장 문태서 순국비 덕유산 무주 구천동 계곡에 문태서 순국비가 있다. 1880~191.. 더보기 창덕궁 낙선재 이야기 : 마지막 황족이 살았던 곳.. 낙선재는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1847년 24대 헌종의 서재 겸 휴식공간이자 경빈 김씨의 처소 석복헌(하늘에서 큰 복을 내려준다) 이 있는 곳이다. 또한 할머니 순헌왕후의 처소 수강재가 있다. ✅ 낙선재를 만든 이유 낙선재는 헌종의 헌신적인 사랑이 깃든 곳이다. 헌종 9년 효헌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에 눈을 감고 만다. 다음 해 새 중전을 뽑기 위해 삼간택을 하고 헌종은 전례없이 간택에 참여한다. 그때 헌종은 김씨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명헌왕후 홍씨를 선택하고 헌종은 어쩔수 없이 명헌왕후를 대비로 들인다. 하지만 헌종의 김씨에 대한 마을을 지울 수 없었고 3년이 흐른 뒤 헌종은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비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한 보금자.. 더보기 정조 융릉(사도세자), 원릉(영조) 조성 이유 , 배경 정조 사도세자 능을 옮긴 이유 정조는 어린 시절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버지 죽음을 모두 시켜봤다. 그리고 즉위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한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사도세자(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 융릉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도사제는 지금 서울시립대가 있는 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혀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사당 경모궁을 조성하고 14년의 계획 끝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성 인근으로 이장한다. 이유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물기가 많고 뱀이 출몰하는 흉지라고 생각해 왕이 된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닌 끝에 1789년 수원 화성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한다. 현재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융릉 앞 문인석의.. 더보기 세종대왕 묘 영릉을 이장한 이유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승하했다. 맏아들 문종은 유언에 따라 태종 세종의 부모님이 있는 헌릉 인근 수릉지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런데 그 터를 두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장남을 잃고 손이 끊어지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최양선의 말때문인지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457년 10월 21일 문종의 외아들 단종 마져 17살에 사망하게 되니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 역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이 20살에 사망한다. 예종의 맏아들 인성대군도 3살때 죽었다. 결국 세종의 영릉은 여주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날 33)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를 이장한 이유 문종은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예체능,병법에도 능.. 더보기 북한산 승가사와 고려 현종 고려시대 북한산은 삼각산으로 불렸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봤을때 북한산의 세 봉우리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여 삼각산이라 불렸다. 이 삼각산에 정종, 문종, 선종, 숙종,예종, 의종등 수많은 고려의 왕이 행차했었다. 북한산 승가사는 756년 신라 경덕왕 15년에 승려 수태에 의해 창건된 절로 당나라때 큰 업적을 쌓았고 생불로 불렸던 승가대사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담긴 절이다. 이 절에 고려 현종의 흔적이 있다. 승가사 약사전에는 승가대사 불상이 있는데 불상 광배 뒷면에 글이 적혀 있다. 승가대사는 정수리 구멍에 솜으로 막아놓은 구멍이 있었다. 이것을 낮에 막아놨다가 밤에 구멍을 열면 향기가 나와서 방에 퍼져 좋은 냄새를 풍겼다고 했고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들이 그 물을.. 더보기 무주 나제통문의 비밀 전라북도 무주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의 접경지로 군 전체가 소백산맥에 속한다. 골짜기는 깊고 산세는 험준하다. 무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구천동 계곡이다 제 1경 나제통문의 비밀 이 아름다운 무주 구천동은 삼국시대에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무주 구천동 33경의 시작점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석모산이 있는데 1500년 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석모산을 경계로 말투와 생활이 다른 주민들이 살고 있다. 석모산 나제통문을 통해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 왕래를 했다고 한다. 이 경계에 세워진 나제통문을 역사적 통로라 믿었다. 이 일대는 신라와 백제가 영토 확장을 위해 맞붙었던 곳으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 영토확장을 위한 두 나라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던 곳이다. 나제통문.. 더보기 이전 1 ···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