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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청와대 소정원 , 대통령 관저 소정원 청와대 소정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걸었던 길이 있고 사망이 뚫려있어 청와대 본관, 관저등, 모든 건물로 통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야생화로 가득하다. 청와대 구본관 터 고려때 부터 청와대 자리는 명당으로 불렀다. 1990년 청와대를 새로 만들 때 청와대 자리 길지를 알리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연릉오거라는 사람이 새긴 글로 중국 남송 시대 연릉 지역에 살았던 명필 오거의 글자를 집자해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이 글씨를 새긴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을 위해 원납전을 백성들에게 받아야 했는데 원성이 커지자 왕권강화, 민생 안정을 위해 천하제일 명당에 궁궐을 중건해야 한다는 명분이 필요해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흥선대원군의.. 더보기
Blue House 투어 :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 2022년 대중에게 전면 개방된 청와대 뒤로 높이 342m 의 북악산이 위치해 있다. 사람의 얼굴을 닮아 면악 또는 백악산이라고 불린다. 큰 바위 두개가 용의 눈으로 옛날부터 전해지기로 청와대, 경복궁 터가 북악산용의 기운에 딱 맞는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라고 이름은 언제부터? 지은 이유 원래 청와대 이름은 조선시대 이곳은 군사훈련 및 과거 시험을 보던 경무대로 사용되었고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가 총독 관저가 지어졌던 그 터 자체의 이름이 경무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통령 관저이름을 경무대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로 인해 경무대의 이름이 정치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윤보선 2대 대통령이 다른 대안으로 찾은 이름이 청와대였다. 청와대에 푸른.. 더보기
완도 고금도 묘당도 속 충무사 이순신 유해가 잠들었던 곳.. 묘당도 전남 고금도에는 묘당도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다. 원래는 섬이였으나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와 하나가 되었다. 충무사 1597년 7월 명나라 원군, 해군이 도착한다. 진린이 이끄는 5천여 군사들이 고금도에 진을 쳤다. 이후 명나라 해군과 연합작전을 펼친다. 그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던 곳에 충무사가 있다. 충무사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던 관왕묘가 있던 자리로 전쟁 후에 이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이 관왕묘비를 세운 사람은 명나라 해군 사령관 진린이다. 월송대 이순신이 마지막 노량해전을 치른 후 전사하고 임진왜란도 끝이 난다. 이순신의 유해는 이곳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는 고금도에 임시로 안장된다. 지금도 이순신의 초분지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그의 고향이자 선영이 있.. 더보기
용산 미군 기지 투어 드래곤 힐 호텔 서울 시내 한복판에 미군 기지가 있었다. 용산 기지의 면적은 여의도의 절반 규모로 축구경기장 200개 크기의 기지였다. 그러나 지도에서 확인하면 용산 미군 기지는 표시 되지 않았다. 반환된 용산 기지가 개방되었다. 아래 하얀 건물은 미군이 이곳의 주인이 되기 전 일본군 초소였다. 현재 드레곤 힐 호텔 자리는 일본 조선군 사령관 관저가 있었던 자리에 호텔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군 초소와 돌기둥이 아직 남아있다. 용산기지 안에는 곳곳에 문인석과 동자상들이 남아있다. 이것은 무덤을 지키던 석상들인데 옛날에 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증거이다. 사우스포스트 용산 미군기지는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로 나뉜다. 사우스포스트 벙커 용산 군사시설 중 제일 상징적인 곳으로 일제 시대 일본.. 더보기
부산 유엔기념공원 : UN 공원 속 참전국 이야기 한국전쟁은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불과 5년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지원병은 상당수가 20대 전후였다. 유엔기념공원 7월 27일은 UN군 참전의 날로 우리나라에서 지정되어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유엔군의 희생과 봉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50년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로 인해 UN군 사상자가 늘며 유해 안장할 곳이 필요했고 제한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1월 6.25 전쟁 전사자 매장을 위해 UN군 사령부가 조성한 곳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장병들의 유해를 모아 안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일의 UN군 묘역으로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11개국 2327명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한국인으로 UN묘지에 안장된 36명은 모두 카튜샤들이다. 전쟁 중.. 더보기
연천 경순왕릉 : 신라의 마지막 왕은 왜 이곳에 묻혔나? 10세기 후반 978년 신라 56대 임금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의 계속된 침공에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내어준다. 그리고 경순왕은 개경에서 눈을 감는다. 경순왕의 관은 조상들이 묻힌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왕실은 왕의 무덤은 수도에서 백리밖에 두지 못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운구를 멈추게 했다. 고려는 신라 유민들의 봉기를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경순왕은 결국 고랑포 신라 국경을 눈 앞에서 두고 개경에서 80리 거리 북쪽 언덕에 묻히게 된다. 경주 밖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야산에 버려졌던 경순왕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라진다. 그러다 조선 영조때 1746년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지만 또 다시 잊혀진다. 그러곧 한참 뒤 1970년대 들어서야 총탄 가득한 경순왕.. 더보기
김유신 : 삼국통일 진실은? 계획에 없었다 ?! 천년 신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 경상북도 경주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곳곳에 신라 1000년의 역사와 보물이 숨어 있다. 김유신 이야기 경주 송화산 초입 화려한 무덤 하나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 장군이다. 1970년 남북이 분단되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대통령 박정희는 북쪽을 바라보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경주 황성공원에 세웠다. 김유신은 그 예전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되었고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가 열전으로 3권이 있다. 그러나 김유신은 경주 사람(경주 김씨)이 아니다. 신라가 멸망시킨 가야의 후손 김해 김씨이다. 또한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진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유신은 부모님이 거처를.. 더보기
허준 무덤 이곳에? : 허가바위에서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집필까지.. 허준 무덤 임진왜란때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다. 이때 모두 86명이 따라갔는데 내시가 24명, 마구간 지기 6명, 의관이 2명, 별좌와 사알(심부름꾼)이 2명이였다는 기록이다. 이때 의관 2명중 한 사람이 허준이었다. 그는 선조를 수행했던 왕실 주치의였다. 이곳에는 세 개의 묘가 있다. 부인 안동 김씨, 허준 어머니 , 허준이렇게 세 사람의 묘로 추정된다.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가 양천 허씨 족보를 바탕으로 하포리를 뒤져서 허준과 관련된 비석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전남 진주박물관에 있는 태평회맹도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잘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호성공신이라는 훈장을 하사하 임금이 선물한 그림이다. 호성공신 양평군 허준이라고 적혀있다. 허준은 죽어서 양평군이라는 직위를 받게 .. 더보기
고랑포, 호로고루 이곳 어디? 고랑포 임진강에서 가장 폭이 좁고 얕은 고랑포는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고랑포에서 결정될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2002년 남북평화협력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에서 제작해 한국에서 전시된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릉비를 고구려 유적지 고랑포에 세웠다. 호로고루 임진강 남쪽 절벽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로고루가 있는 이곳은 옛날 1500년전 삼국시대에 치열한 전쟁터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전쟁을 벌였던 곳이다. 호로고루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피비린대 나는 전쟁을 벌었다. 보리밭 언덕 넘어 흐르는 강이 임진강인데 그 임진강을 옛날 사람들은 '호로하' 라고 불렀고 그 언덕 위에 있던 요새를 호로고루라고 부른다. 5세기 장수왕 시대 고랑포를 건넌 고구려 군이 세운 성채이지만 높지는 .. 더보기
합천 함벽루 : 대야성 전투 김춘추 복수극의 시작.. 합천 함벽루 경상남도 합천 황강벽에는 함벽루가 있다. 합천하면 해인사를 많이 떠올리지만 합천에는 다른 볼거리도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함벽루인데 이 작은 정자에 많은 문인이 찾아와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 남명 조식 (1501~1572) , 퇴계 이황이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또한 구한말 의병장 이범직 또한 자신의 글을 이곳에 남겼다.     조선 중기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로 이 세사람을 빼고는 성리학, 정치, 유학을 논할수 없는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이다.   을사늑약 당시 황제 고종을 윽발질러 나라를 팔아먹는데 도장을 찍게 만든 을사오적 중의 한 사람 이은용(이지용)의 이름도 커다랐게 새겨져 있다.     대야성 위치, 흔적들7세기 초 신라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