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Here

창덕궁 낙선재 이야기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사랑채이자 경빈 김씨의 처소 석복헌(하늘에서 큰 복을 내려준다) 이 있는 곳이다. 또한 할머니 순헌왕후의 처소 수강재가 있다.   낙선재를 만든 이유 낙선재는 헌종의 헌신적인 사랑이 깃든 곳이다. 헌종 9년 효헌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에 눈을 감고 만다. 다음 해 새 중전을 뽑기 위해 삼간택을 하고 헌종은 전례없이 간택에 참여한다. 그때 헌종은 김씨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명헌왕후 홍씨를 선택하고 헌종은 어쩔수 없이 명헌왕후를 대비로 들인다. 하지만 헌종의 김씨에 대한 마을을 지울 수 없었고 3년이 흐른 뒤 헌종은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비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한 보금자리로 즐거움이 오래가라는 의미에서 즐거울 낙, 착할 .. 더보기
정조 융릉(사도세자), 원릉(영조) 조성 이유 , 배경 정조 사도세자 능을 옮긴 이유 정조는 어린 시절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버지 죽음을 모두 시켜봤다. 그리고 즉위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한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사도세자(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 융릉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도사제는 지금 서울시립대가 있는 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혀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사당 경모궁을 조성하고 14년의 계획 끝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성 인근으로 이장한다. 이유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물기가 많고 뱀이 출몰하는 흉지라고 생각해 왕이 된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닌 끝에 1789년 수원 화성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한다. 현재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융릉 앞 문인석의.. 더보기
세종대왕 묘 영릉을 이장한 이유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승하했다. 맏아들 문종은 유언에 따라 태종 세종의 부모님이 있는 헌릉 인근 수릉지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런데 그 터를 두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장남을 잃고 손이 끊어지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최양선의 말때문인지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457년 10월 21일 문종의 외아들 단종 마져 17살에 사망하게 되니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 역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이 20살에 사망한다. 예종의 맏아들 인성대군도 3살때 죽었다. 결국 세종의 영릉은 여주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날 33)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를 이장한 이유 문종은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예체능,병법에도 능.. 더보기
북한산 승가사와 고려 현종 고려시대 북한산은 삼각산으로 불렸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봤을때 북한산의 세 봉우리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여 삼각산이라 불렸다. 이 삼각산에 정종, 문종, 선종, 숙종,예종, 의종등 수많은 고려의 왕이 행차했었다. 북한산 승가사는 756년 신라 경덕왕 15년에 승려 수태에 의해 창건된 절로 당나라때 큰 업적을 쌓았고 생불로 불렸던 승가대사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담긴 절이다. 이 절에 고려 현종의 흔적이 있다. 승가사 약사전에는 승가대사 불상이 있는데 불상 광배 뒷면에 글이 적혀 있다. 승가대사는 정수리 구멍에 솜으로 막아놓은 구멍이 있었다. 이것을 낮에 막아놨다가 밤에 구멍을 열면 향기가 나와서 방에 퍼져 좋은 냄새를 풍겼다고 했고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들이 그 물을.. 더보기
무주 나제통문의 비밀 전라북도 무주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의 접경지로 군 전체가 소백산맥에 속한다. 골짜기는 깊고 산세는 험준하다. 무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구천동 계곡이다 제 1경 나제통문의 비밀 이 아름다운 무주 구천동은 삼국시대에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무주 구천동 33경의 시작점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석모산이 있는데 1500년 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석모산을 경계로 말투와 생활이 다른 주민들이 살고 있다. 석모산 나제통문을 통해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 왕래를 했다고 한다. 이 경계에 세워진 나제통문을 역사적 통로라 믿었다. 이 일대는 신라와 백제가 영토 확장을 위해 맞붙었던 곳으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 영토확장을 위한 두 나라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던 곳이다. 나제통문.. 더보기
동양척식 주식회사 : 목포 근대역사관 2관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우고 제국주의 침략을 민영화한 것이다 .정부나 왕실 소유의 농토, 숲, 산지 등이 조선총독부 소유로 넘어가고 이것을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겨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살수 있게 했다. 일종의 부동산회사였다. 처음에는 농지부터 시작했던 수탈이 점차 광산, 금융까지 확대되어 갔다. 중일전쟁이후 전쟁 물자가 필요해진 일본은 놋그릇, 제기 등 쇠붙이를 모두 공출해간다. 모든 것을 공출당해서 밥그릇이 없게 되자 일본에서 사기로 만든 밥그릇에 결전, 보은 등의 글자를 적어 일본 왕의 하사품이라고 준 밥그릇이다. 그러나 일본은 밥그릇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밥그릇이고 크기가 작아 들고 먹는데 우리나라는 고봉밥이다. 더보기
제주 출륙금지령 억압의 땅 역사.. : 제주목_관아 , 관덕정 제주목_관아 옛날 제주도는 탐라국이라고 해서 원래 독립된 문명으로 존재했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3성의 시조가 나타나 생긴 나라라는 설화가 있다. 통일신라때부터 문화적 교섭이 시작되었고 신라가 탐라를 끌어들이려고 탐라 우두머리에게 성주, 왕자 등의 작위도 주었다. 고려 중기때부터 고려의 행정체계에 탐라가 편입이 되었다. 제주에 지방관을 고려 중앙 정부가 파견하고 제주목이 된 후, 조선 시대까지 유지 되었다. 그래서 제주목 관아는 역사적인 제주 행정의 중심지로 제주목 관아의 옛날 이름은 성주청이었다. 목 관아 앞에 있는 정자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관아 건물로 1448년 제주 목사 신숙청이 창건 현재 보물 제 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 관덕정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을 .. 더보기
포석정 : 경애왕은 적이 쳐들어오는 때 정말 유상곡수연을 즐기고 있었나? 포석정의 그날 포석정에 대한 이야기로 후삼국 시대 신라 경애왕은 적이 들어오는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신라가 망한 결정적 장면으로 많이 회자가 되고 있다. 후삼국시대 중심은 서라벌 경주였다. 후백제 견원은 신라의 중심부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11월에 견원은 신라의 왕경에 침입하였다.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왔을때 부인과 궁녀를 데리고 포석정에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포석정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기고 있었다. 술잔이 물 위에 띄워서 수로를 따라 떠내려 오던 술잔이 멈추면 술을 먹는데 술잔이 올때 까지 시를 지어야 하고 만약 도달할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3잔을 마셔야 했다. 그렇다면 경애왕은 정말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겼을까? 포석정은 무엇.. 더보기
독립문 건립 배경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독립문 건립 배경 1896년 세워진 독립문은 19세기 조공, 책봉 관계였던 조선과 청나라 시대인데 1636년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신하의 나라가 된다. 1882년 임오군란등을 거치면서 내정 간섭을 강화했던 청나라였으나 청일전쟁을 청나라가 패하자 1895년 청의 내정간섭에서 조선이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의 독립을 축하하는 기념문을 세우려고 했고 이왕이면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옆자리에 독립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독립문의 독립의 의미는 일본이 아닌 청나라를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 강화를 위해 독립문을 이용한다. 독립문과 일본의 관계 독립문은 일제 강점기때.. 더보기
딜쿠샤: 앨버트 테일러 3.1 운동 전세계 알리다. 딜쿠샤 앨버트 테일러 딜쿠샤에 산 앨버트 테일러는 금광 사업가 겸 뉴스 통신사의 통신원이었다. 그는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 아마 앨버트 테일러가 아니었다면 전 세계에서 주목도 안 했을지 모른다. 앨버트 테일러는 이 은행나무를 보고 집터를 이곳에 잡았다고 한다. 이곳은 권율 장군의 집터이기도 하다. 이 은행나무를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3.1 운동 기사는 전달 배경 고종의 국장 행렬을 사진에 담아 전세계에 타전하게 된다. 그가 찍은 사진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이를 취재하고 사진으로 남겨 숨겨져 있던 조선의 상황을 세상에 알린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앨버트 테일러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게 된다. 1919년 2월 28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