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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민공원 역사 부산시민공원 터는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 경마장으로 시작되었다. 1937년 ~45년 중일 전쟁, 태평양전쟁 때는 군사훈련소로 사용되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사용했다.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미군은 철수하지만 1950년 한국 전쟁 발발로 다시 주둔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몇 십년 간 미군기지로 쓰인 땅이었다. 50~60년 동안 미군이 사용하다가 2010년에 공식적으로 반환이 되었다. 그때부터 이곳을 공원을 만들어서 부산시민공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간이다. 미군이 막사로 쓰던 곳을 개조해 카페, 도서관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 부사관들의 숙소로 쓰이던 곳은 문화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도자기 공방을 비롯해 예술.. 더보기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인 이유 / 부산 동래읍성 가야의 흔적 동래읍성 가야의 흔적 부산 동래읍성은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고대부터 있던 읍성이다. 동래읍성의 규모는 서울의 사대문 안처럼 부산 동래구의 넓은 지역을 포함한다. 조선 후기에 증축해 넓어진 성곽의 모습만 남아있다. 북문 주변으로 성곽 복원이 잘되어 있어 그 풍경도 아름답다. 제주도에 가면 망자의 넋을 구분하고 동물침입들을 막기 위해 무덤을 돌담으로 쌓는 풍습인 산담이라고 있다. 그곳과 비슷한 모양의 사각형 지형이 동래읍성 북문에 있다. 1969년에 복천동에서 금관가야 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가야 고분의 발굴 조사는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많이 와서 판잣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 새로운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팠는데 도자기들이 많이 나와서 그 지역을 보존하여 뒷 세데에 더.. 더보기
부산 영도 다리 = 영도대교 : 흰여울 마을 부산 영도영도는 부산의 남쪽에 자리잡은 섬으로 현재 부산항, 영도, 남항대교 등 4개의 다리가 부산내륙과 연결되어 있다.  영도는 16세기 동아시아 최대 전쟁 임진왜란의 첫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다. 1592년 4.13일 부산에 상륙한 700여척의 왜선에  만 팔천 여명의 왜군을 싣고 가장 먼저 침략한 곳이 부산 영도였고 한반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그때 부산의 무사 정발 장군이 영도에서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사냥 중이였는데 이를 보고 부산 진성으로 들어가 대비를 했다. 임진왜란 첫 전투 부산진 전투에서 600여 명의 병사와 정발 장군은 장렬히 전사하고 부산 진성을 지켰다.  부산 영도다리=영도대교영도다리는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부산 중구와 영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 다리이자 한국 최초의 유.. 더보기
신사임당 이야기 (본명, 오죽헌, 남편 이원수를 택한 이유, 대표작 등) 75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현모양처로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녀는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휼륭한 아내로 알려진 대표적인 조선의 여성상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살던 조선 초기 , 그녀는 현모양처로 유명했던 것이 아니였다. 사실 그녀는 유명한 화가였다. 율곡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산수화와 포도를 잘 그렸던 화가로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만 무료 40여점에 이르고 5만원권 지폐 속에서도 그녀의 작품들이 2개나 들어가 있다. 사실 오천원 지폐에는 이미 신사임당의 그림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오만원권 뒷면에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 어몽룡과 이정의 그림을 넣었다. 오죽헌 그런데 왜 우리는 많은 그림을 남긴 신사임당을 화가가 아닌 현모양처로만 기억하는 것일까? 신사임당은 1504년 조선의 대표 명문.. 더보기
안견 몽유도원도 안견은 조선시대 그림을 담당하던 도화원 관청의 화원으로 일을 했다.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조선 건국 이래 화원 최초 정 4품까지 전례없는 파격 승진을 했던 인물이다. 산수화로는 당대 화가중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화풍이 일본에까지 유행할 정도로 영향력 있던 인물이 안견이다. 더보기
무하마드 알리 : 권투의 전설 개명한 이유.. 흑인 운동가 말콤 엑스의 영향으로 인생이 바뀐 인물 중 한명이 무하마드 알리이다. 모든 한국인이 알고 있는 살아있는 권투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이다. 무하마드 알리는 총 61번의 경기중 56승, 그 중 37번은 KO승을 거두었다. 경기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치 흑인들에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은 인물로 지금까지 흑인의 자부심을 올려준 위대한 선수이다. 무하마드 알리 개명하다. 무하마드 알리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로 금메달을 쟁취한다. 어느 날 무하마드 알리가 고향의 식당에 들어갔다가 흑인에게 음식을 안판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은 변하였는데 여전히 흑인들의 인권은 바뀌지 않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네이션 오브 이슬람 종교가 발간 신문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말콤 엑스의.. 더보기
논개의 흔적을 찾아서 논개에 대한 1차 사료가 거의 없다. 논개가 처음 문서로 기록된 것은 유몽인의 이 최초 기록이다. 19세기 들어서면서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는데 전라북도 장수 사람이고 논개의 성은 주씨로 진주성을 지키러 왔던 의병장 최경회 장군의 후처였다는 설이 있다.논개는 1차 전주성 전투 직전에 왔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최경회 장군이 사망하자 논개는 바위 끝에 선다. 왜군 장수 하나가 접근을 하게 되고 이에 주논개는 그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논개가 기생이였는지 기생인 척을 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진주 시민들이 논개 이야기를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금은 댐이 건설되어 유속이 많이 느려졌으나 옛날에는 당시 6월에 장마철이라 유심이 깊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주.. 더보기
3.1 운동 의의: 유관순 열사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천안에 가면 독립기념관이 있는데 1982년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초.중.고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 침략을 진출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토지 약탈을 토지소유권 확인으로 표기하는 드의 왜곡된 역사를 기술했던 것이다. 이에 대대적으로 반일운동이 일어났고 우리나라 국민이 성금을 모금해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전 대한제국에는 지금의 헌법과 같은 대한국국제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제국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쓰여있다. 3.1 운동 의의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500년 전래하시고 만세에 걸쳐 불면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 이것의 의미는 조선의 모든 것은 황제에게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한테는 주권이 없다는 거다. 황제의 권한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