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병자호란 홍타이지 청이 조선 침략 이유 :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이유 (이전글) 정묘호란 : 조선인이 후금에 요청했다. !!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 조선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가슴 아팠던 사건 병자호란(1636년 12월) 이다. 청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명을 공격해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문제는 인가 적다는 것이다. 조선이 뒤를 공격하게 되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전에 조선을 포섭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때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하는 나라였다.이유는 1592년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도와줬기 때문이고 조선시대는 위계질서를 중시했기 때문에 명나라를 공격하면 국가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고 인조는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이 된 임금인데 이때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이 광해군의 폐모를 명분으로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을 공격하면 반정의 명분과도 .. 더보기 인조는 어떤 인물 ? 드라마 연인 속 인조는 두 차례의 전쟁으로 무기력했던 왕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14년전 인조는 반정을 일으킨 상남로 창덕궁의 돈화문을 부수고 궁으로 들어가 인조반정(1623)을 일으킨 인물이다. 인조와 광해군의 관계는 삼촌과 조카 관계였다. 선조에게는 아들이 많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광해였고 인빈김씨 3째 아들 정원군의 첫째 아들이 훗날 인조이다. 광해가 세자일때 인목왕후에게 적통 영창대군이 태어나게 되고 이때문에 불안하게 된 광해였다. 광해는 적장자 콤플렉스도 있었다. 또한 아버지와 동생을 광해에게 잃어버린 인조는 서인세력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된다. 그러나 왕이 된 이후 인조는 3번의 몽진을 하게 된다. 이괄의 난 (1624) ,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이다. 자세히 보기 인.. 더보기 병자호란 이후 정축화약 내용 정축화약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명나라에 하던 것을 청나라에 하는 것이다. 청에 인질로 간 사람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만은 아니였다. 전쟁중에 잡아들인 조선의 백성들도 포로로 끌고 갔던 것이다. 청나라 포로가 된 사람들을 '피로인'이라 불렀다. 청나라에서는 이 피로인들을 노예로 취급하며 이들을 사고 팔았다. 더보기 드라마 연인 속 주화파 VS 척화파 논쟁 , 광교산 전투 , 그리고 ... 주화파 대표적 인물 최명길이 있다. 척화파의 대표 인물 김상헌이 있다. 인조 옆에 주화파의 특징은 실무가 중요한 현실주의자들이었고 청과의 전쟁을 막아 현실적 피해를 줄이는데 주력하고자 했던 세력이었다. 반편 척화파의 특징은 명분이 중요한 원리주의자 세력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어떤 게 정의고 합리적인 건지 고려했던 세력이었다. 당시는 국제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존망과 직결된 문제를 두 세력모두 쉽게 결정할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왕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오던 근왕군들은 패배를 이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혹한기까지 이어져 줄줄이 병사들은 병들고 얼어 죽어갔다. 광교산 전투 그러나 모든 전투에서 패한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속에 손에 꼽는 대승 광교산 전투.. 더보기 드라마 연인의 이장현은 실존인물? 이장현이라는 인물은 없고 '장현' 이라는 인물이 있다. 성이 장 이름이 현 장현 역관 출신에 집안은 대대로 역관 집안으로 당대 최고 부잣집의 아들이다. 인조부터 숙종 때까지 두루 활약했던 장현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갈 당시 장현도 같이 동행하게 된다. 심양에 머물며 주요 인물과 은밀히 교류하며 당시 정세 파악에 큰 도움을 줬다. 이후 그 공로로 수석역관은 물론 수임으로 있던 40년 동안 연경에 간 것이 30여 번이고 여러 공무에 있어 그의 주선에 힘입은것이 많았다. 장현의 외모 또한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하였다. 통문관지 내용을 보면 잘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보기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 선택 이유 ? 그날 430 이전글 보기 현재 우리는 6공화국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헌법은 1948년 9차례 개정되었으며 지금의 헌법은 제 6공화국 헌법으로 6월 항쟁 이후 개정된 헌법이다. 이 헌법을 만들기 위한 능력있는 소수의 사람이 필요한데 헌법을 만들 당시 8인 정치회담을 구성했다. 1987년 7월 8인 정치회담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4명과 당시 통일민주당 4명으로 구성되었었다. 그리고 계파별로 들어갔다. 이는 전두환+노태우측 4명과 김영삼 측 2명+김대중측 2명으로 여야 총 8명이 모여 개헌안 논의를 했었다. 6공화국 헌법 쟁점 사항 개헌 이후 치뤄질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의견을 반영 및 논의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대통령 임기와 단임제인지 중임제인지가 쟁점 사항이었다. 당.. 더보기 선형공원 경의선 숲길 공원 : 연트럴파크, 뉴욕 하이라인 (Q 1-3) 이전글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역사 : 자유공원, 탑골공원, 어린이대공원 (Q 1-2) 경의선 숲길 공원 : 연트럴파크 공원은 도시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진화해왔는데 도시의 일부를 넘어 도시를 살리는 존재로 역할을 하기시작했다. 근대 도시의 산물인 공장과 철도 산업시설, 문류시설들이 산업구조의 변화로 문을 닫기 시작했고 폐기되고 방치되면서 큰 문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이곳을 공원으로 바꿔 공간재생을 위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 예로 연트럴파크가 있다. 정식명칭은 경의선 숲길 공원이다. 경의선이 지나가던 철로를 경의선을 지하화 하면서 버려지게 되었는데 공원으로 바꾸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낙후된 철길 주변 지역이 공원과 함께 급부상하게 되었다. 경의선 숲길의 길이는 6.3km 로 길이는 센트럴.. 더보기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역사 : 자유공원, 탑골공원, 어린이대공원 (Q 1-2)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자유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은 개항 도시 인천에서 만들어졌다. 지금은 자유공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각국공원이다. 1888년에 인천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이다. 외국인 거주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각국공원은 6.25 이후 자유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서울 최초의 공원 탑골공원 탑골공원의 원래이름은 파고다 공원인데 지금은 노인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지만 19세기 말 이곳은 경성의 핫플레이스로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집결하던 장소였다. 고종의 명을 받아 옛 원각사 터에 조성한 공원으로 한국인을 위해 세운 최초의 공원이며 1919년 3.1 운동의 발원지인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 현재 서울에는 많은 공원이 있지만 당시만해도 대부분이 산이 공원의 기능을 했다. 그것.. 더보기 이전 1 ··· 33 34 35 36 37 38 39 ··· 6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