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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역사 (어떻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나?)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의 나라이지만 2023년 1인당 GDP 88.450 달러로 아시아 1위,  세계 5위의 경제 부국으로 뽑히는 나라이다. 또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 5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싱가포르는 인구 약 600만 명의 작은 나라로 구글, 아마존, 애플 등 약 5천개 이상의 다국적 기업과 세계적인 금융사가 다수 진출해 있고 석유화학, 전자 등도 첨단 제품 수출을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불과 200여 년 전만 해도 해안가를 뒤덮은 두개골과 수천 마리 쥐가 들끓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죽음의 섬이었다. 땅의 대부분이 늪지대와 정글뿐이었고 마실 물조차 굉장히 부족했다.   싱가푸라 왕국1299년 싱가포르는 싱가푸.. 더보기
프랑스 혁명 1789년 민주주의 근간이 되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 프랑스 혁명은 세금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있으나 실제 프랑스 정부 예산에서 왕실 예산은 겨우 5%였다. 그래서 왕실의 사치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프랑스 세금의 70 퍼센트는 국방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은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때 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왕정의 부채가 1년 예산의 15배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방법으로 세금을 올렸던 것이다.  문제는 앙시앙 레짐 이라는 구체제 사회의 모순이었다.  당시 평민 계급은 프랑스 인구의 98%였고 귀족 성직자 2% 였는데 평민 중에도 돈이 많은 은행가나.. 더보기
북촌 한옥마을 어떻게 탄생했나? 정세권 그는 누구인가? 북촌과 남촌 북촌 한옥마을의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는다. 북촌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부터 쓴 명칭이다.  조선시대 북촌은 현재 가회동, 인사동을 포함 현재보다 더 넓었던 지역으로 왕족과 권세높은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근처에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북촌과 더불어 청계천 남쪽에 남산까지 아우르 지금의 명동, 을지로, 충무로 지역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북촌과 달리 남촌은 권세가 낮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북촌과 남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1880년대 후반부터 유입되어 남촌에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 사건 경술국치가 되고 한양의 이름을 경성으로 바꾼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의 세력이.. 더보기
고려와 몽골 관계 간략 역사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이유는 당시 금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던 거란족이 몽골군의 힘을 등에 업고 독립을 꽤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란이 결국 몽골을 다시 배신하게 되고 몽골의 자신의 신념인 배신자는 끝까지 응징한다는 원칙대로 거란족을 끝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거란족이 도망온 곳이 고려였다.    서로 다른 외교 방식의 차이등으로 몽골 사신이 올때마다 충돌이 벌어지고 그러던 어느 날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231년 몽골에게 침략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고 그렇게 28년간의 몽골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긴 싸움끝에 고려 태자 원종이 아버지를 대신해 몽골 칸 몽케를 찾아간다. 그런데 가던 길에 몽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때 원종이 다음 칸이 된 쿠빌라이를 찾아가서 기.. 더보기
일본인 사고방식의 근간 ..( 일본 우익재단 사사카와 재단이 하는일) 일본인 사고방식은 무엇?일본은 700년간 사무라이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일본 사람의 사고방식에는 손자병법적인 사고방식이다.  사무라이 사고방식이란 전략적인 지성을 바탕으로 한 칼의 문화이다. 싸우기 이전에 생각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상대를 연구하는 문화가 사무라이 사고방식의 기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여러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말처럼 일본은 독도 문제도 전략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진리냐 거짓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면 선이고 패배하면 악인 것이다. 이것이 사무라이 시대부터 내려온 역사적인 일본의 선악 개념이다.   그래서 일본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논리를 만들어 그 논리를 한국인에게도 주입시켜 한국인의 신념을 꺽어버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신 친일파를 양성하는 것.. 더보기
독도 분쟁 문제의 시작점은 언제부터 ? 한일 독도분쟁의 시작 1965년 6월 도쿄에서 해방 후 단절됐던 한일 간 외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협정으로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이때 일본은 독도문제를 걸고 넘어졌던 것이다.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회부하자는 것이었다.    오랜 협의 끝에 양국 간의 교환 공문을 체결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들끓던 상황이었고 이에 한국대표단은 한일협정 무효화를 하겠다고 하 독도명칭을 빼고 교환 공문을 체결하게 된다. 사실상 독도를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1965~93년까지는 독도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새로운 국제연합 해양법 조약그런데 1994년 UN총회에서 새로운 국제연합 해양법 조약을 발효했다. 1994년 이전까지는 자국 연안으로부터 약 22km 12해리에 불과했던 영해를 배타적 경.. 더보기
독도 분쟁 문제 국제사법 재판소 재소해야 할까? 한국의 전략은? 1993년까지는 일본의 독도 문제 주장에 무대응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대응을 할수 없게 되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고 이때 무대응을 하게되면 국제법상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은 독도 땅이라고 반박을 해야 한다. 반박하지 않을 경우 소극적 인정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재판소에 가도 충분한 증거가 있기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일부러 가지 않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독도는 분쟁 지역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독도가 일본 것인지 한국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재판 거부 불가 즉 관할권.. 더보기
한민족 역사 (한민족 기준이란 :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는 우리민족인가?) 한민족 시작점 조선시대 쇄국정책 이전에는 국경이 엄격하지 않아 고려 시대까지는 자유롭게 다른 나라를 이동했다. 동아시아에 쇄국의 질서가 만들어진 건 1800년 도 말이다. 조선은 흥선대원군 시대, 일본은 도쿠카와 시대, 중국도 청나라 시대였다. 이 균형이 꺠진 것이 아편전쟁이었다.   이 아편전쟁은 아시아가 서양 오랑캐에게 너무나 크게 깨졌고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강제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일본 -조선 순으로 강제 개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주민 역사 이때 쇄국정책으로 묶여놨던 조선인들이 만주 땅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만주 땅은 성지로 생각해서 중국인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빈땅으로 놔뒀는데 바로 그 땅으로 조선인들이 이주한다.   만주를 이어 연해주까지 개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