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대영 박물관 이집트 전시관 로제타석에는 무엇이 기록되어있나? 139 -4 고대 이집트 유물이 유럽의 무분별한 도굴과 외교 수단으로 이용되어 엄청난 양의 유물이 이집트로부터 빠져나갔는데 이런 것들이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 전시관을 채우게 된다. 1층 전시실 대영박물관은 1층과 2층에 걸쳐 이집트 유물을 전시되어 있다. 1층 전시실에는 거대한 유물이 가득하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과 다양한 파라오들의 석상을 볼수 있다. 로제타석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이집트 유물을 로제타석이다. 1799년 나폴레옹의 원정군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영국의 전리품이 되어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거대한 석비에 새겨진 문서이다. 로제타석은 세 가지 서로다른 문자로 적혀있다. 이 비석에서 24명의 파라오 이름이 밝혀지게 된다. 로제타석에 의해 고대 이집트 문자의 뜻을.. 더보기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영국과 프랑스에 있는 이유 139 -3 이집트 유물이 해외에 훨씬 더 많은 이유 특히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에는 이집트 유물이 이집트 현재 보다 더 많다. 많은 이집트 유물이 도굴되어 다른 나라로 반출되었고 이집트 유물을 통째로 가져간 사례도 많은데 그 중에 통째로 가져간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이 오벨리스크이다. 프랑스 콩코드 광장에 오벨리스크를 볼수 있다. 도굴은 아니지만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신전 앞에 세워두는 일종의 표지석으로 피라미드 모양의 첨탑을 가진 단석체 조형물이다. 이집트 모하메드 알리 총도근 강대국과의 외교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오벨리스크를 선물했다. 문제는 오벨리스크의 이동이었다. 오벨리스크는 단석체로 한개의 큰 돌덩어리를 훼손하지 않고 옮기는 것이 관건이었다. 약 3년간 전용 선박과 운반 기계를 제작해 기계를 이용해 오.. 더보기 여수 고소대, 선소 유적 여수는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여수 밤바다.. ~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투를 지휘했던 고소대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고소대는 전라좌수영 성체를 보완해 만든 대포 발사대, 포루이다. 예전에는 고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비각만 남아있다. 고소대 (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 ) 수군대첩 비각 옆 타루비가 있다.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1603년 이순신이 전사한지 6년 뒤 (선조 36) 에 이순신 휘하에 있던 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전라도 정읍 현감 이순신이 여기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에 부임했다. 계급은 전라좌수사, 지금의 1함대 사령관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군정은 문.. 더보기 대한민국에 김씨가 많은 이유 : 천민성씨 성씨, 본관기원., 한국 성씨가 적은 이유 성씨의 기원 지금과는 달리 고려 초기에는 성씨가 있는 사람이 적었다. 과거 고려 초기까지도 성씨를 가지는 건 특권이었다. 박혁거세라는 이름의 박도 후대에 붙여진 성이다. 삼국사기에 박씨 성을 쓴 사람의 기록은 없다. 고구려를 세운사람은 주몽이다. 그러나 고주몽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후대에 고씨 성을 붙였기 때문이다. 신라왕의 성씨 김씨와 석씨 또한 자손들은 이름만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부터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했고 중국과 교류하는 순서대로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우리나라도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공자의 성은 공, 이름은 구로 공구이다. 장보고의 경우도 원래 이름은 궁복이다 그래서 당나라에 갔을 때 가장 많은 성씨가 장씨였고 이를 가져온 것이다. 왕건의.. 더보기 청와대 소정원 , 대통령 관저 소정원 청와대 소정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걸었던 길이 있고 사망이 뚫려있어 청와대 본관, 관저등, 모든 건물로 통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야생화로 가득하다. 청와대 구본관 터 고려때 부터 청와대 자리는 명당으로 불렀다. 1990년 청와대를 새로 만들 때 청와대 자리 길지를 알리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연릉오거라는 사람이 새긴 글로 중국 남송 시대 연릉 지역에 살았던 명필 오거의 글자를 집자해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이 글씨를 새긴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을 위해 원납전을 백성들에게 받아야 했는데 원성이 커지자 왕권강화, 민생 안정을 위해 천하제일 명당에 궁궐을 중건해야 한다는 명분이 필요해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흥선대원군의.. 더보기 Blue House 투어 :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 2022년 대중에게 전면 개방된 청와대 뒤로 높이 342m 의 북악산이 위치해 있다. 사람의 얼굴을 닮아 면악 또는 백악산이라고 불린다. 큰 바위 두개가 용의 눈으로 옛날부터 전해지기로 청와대, 경복궁 터가 북악산용의 기운에 딱 맞는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청와대 본관의 푸른 기와는 15만장을 얹은 것이다. 이 푸른 기와는 기와를 굽고 유약을 발라서 1000 도씨가 넘는 고온에서 다시 구워야 한다.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는 130년전 전봉준의 동학농민 운동 실패 후 뿔뿔이 흩어진 동학군의 일부가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새로운 민족 종교 보천교를 창설했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화하던 조선총독부가 일본 종교 신도,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남겨놓고 이 민족 종교들을.. 더보기 한강 다리 폭파 사건 (이승만 대통령 제일먼저 도망, 부역자 처벌? ) 이승만 대통령 도망 한국 전쟁은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후, 북한군이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창덕궁 비원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 국회의 결의 없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서울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황규명 비서만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대전을 거쳐 대구로 이미 가있었다. 이들은 특별 열차를 이용했는데 담요조차 제대로 덮지 못하고, 급하게 트렁크를 들고 급박하게 떠났던 것이다.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게 잡히거나 납북되는 상황이 발.. 더보기 완도 고금도 묘당도 속 충무사 이순신 유해가 잠들었던 곳.. 묘당도 전남 고금도에는 묘당도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다. 원래는 섬이였으나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와 하나가 되었다. 충무사 1597년 7월 명나라 원군, 해군이 도착한다. 진린이 이끄는 5천여 군사들이 고금도에 진을 쳤다. 이후 명나라 해군과 연합작전을 펼친다. 그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던 곳에 충무사가 있다. 충무사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던 관왕묘가 있던 자리로 전쟁 후에 이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이 관왕묘비를 세운 사람은 명나라 해군 사령관 진린이다. 월송대 이순신이 마지막 노량해전을 치른 후 전사하고 임진왜란도 끝이 난다. 이순신의 유해는 이곳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는 고금도에 임시로 안장된다. 지금도 이순신의 초분지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그의 고향이자 선영이 있.. 더보기 이전 1 ··· 38 39 40 41 42 43 44 ··· 8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