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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어떻게 정치에 등장했나? 한국의 현대사는 1950년~2000년대 3김 시대로 한국 정치사의 중심에는 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있었다. 김영삼 : 민주당의 뿌리 김영삼은 만 25세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등장한다. 이후 무려 9선에 성공한다. 1952년 1차 개헌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택산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다. 젊고 잘생겼는데 금수저이기까지했다. 김영삼은 이승만이 속해 있는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는데 이승만이 장기 집권 계획을 위해 개헌을 또 하겠다고 하니 직접 개헌 반대를 외치게 된다. 그러나 결국 2차 개헌이 의결되자 탈당을 결심한다. 그때가 당시 개헌에 반대한 범야당 연합 '호헌동지회' 가 생기고 김영삼은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민주당의 뿌리가 된다. 김종필 제일 논란인 문제는... 5.16 군사정변부터 제.. 더보기
순조 (정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아버지) : 세도 정치의 시작 세조 정치의 기원은 정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위태로운 세자시절을 보낸 정조는 후견그룹의 지원을 뼈져리게 느끼며 왕이 되었고 정조는 죽기 보름전 김조순을 불러 순조의 뒤를 봐줄것을 부탁한다.  정조 사망당시 1800년 순조의 나이는 11세였다. 정조의 반대파였던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대신 수렴청정을 하며 순조의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정조의 유시를 받은 김조순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순조 1년 1801년 수렴청정했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노론의 정적인 남인(정조지지세력) 등 5백여명을 숙청한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정순왕후가 물러난 이후에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 중심에 안동 김씨가 국정을 장악하게 된다. 국왕의 인사권도 유명무실해졌다.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외척들은 삼망에 모두 자신의 세력을.. 더보기
효명세자 개혁정치 : 실제모습은?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정조가 일찍 사망하면서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이때는 세도정권이 만들어지던 혼란한 시기였고 정조가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 순조의 외척 세력 안동김씨 김조순에게 아들 순조를 부탁한다.    적장자 효명세자 그리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명분으로 김조순은 자신의 딸을 순조와 결혼시켰고 외척으로서 안동 김씨 세력을 확장했다. 그렇게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의 집권내내 권력을 휘둘렸던 안동 김씨 세력에 힘을 쓰지 못했던 순조였다. 그런 순조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효명세자이다. 효명세자는 적장자(정식왕비가 낳은 아들) 로 태어났기 때문에 굉장히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숙종 이후로 150년 만의 적장자였다.   효명세자의 실제 외모 .. 더보기
공민왕 개혁정치 그리고 죽음까지 공민왕은 왕이 되자 즉위교서를 발표한다. 교서에는 일국갱시 : 한나라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즉위교서 발표와 함께 개혁을 시작한다. 공민왕은 몽골의 풍습이던 변발을 풀어헤치고 호복도 벗으며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전 분야를 아울러 개혁을 펼쳤다.    조일신의 난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에 기황후의 거센 반발이 있었고 이걸 보던 공민왕의 최측근 조일신이 기황후의 일족 중 기황후의 오빠인 기원을 제거했다. 공민왕의 개혁을 위해 조일신이 벌인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로인해 기황후에게 위협을 느끼고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를 했고 조일신을 죽인다. 그렇게 기황후에게 충성을 보이며 한보 물어났다.  1351년 5월 18일 개혁 3가지당시 기황후와 더불어 기철, .. 더보기
공민왕 신당이 종묘에 있는 이유? 고려 31대 공민왕은 고려사에 중요한 왕 중에 한사람으로 종묘에 고려왕 중 유일하게 자리한 공민왕 사당이 있고 역사상 가장 큰 영토였던 몽골제국이 붕괴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려 500년 왕조의 마지막 불꽃 같았던 왕이다.  공민왕 어떻게 왕이 되었나? 13세기 고려는 30여 년간 대몽항쟁을 이어왔고 고려의 패배 후 원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대대로 원의 황실과 혼인하여 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였다. 공민왕 역시 원나라 노국대장공주와 혼인을 맺게 된다. 또한 공녀라는 이름으로 젊은 여성들이 원에 조공으로 바쳐졌다. 이때 공녀로 갔던 기씨가 황후가 되었고 이후 고려에 관한 일은 기황후가 했었다. 이때 고려는 일본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고 1351년부터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 동해안까지 침략을 했다.   .. 더보기
야쿠자와 마약사업 정치권 연결 배경 (필로폰 = 히로뽕 ) 128-2 (이전글) 야쿠자 기원 야쿠자가 성장한 계기는 1941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때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도시 안에서 권력을 가진 야쿠자를 적극 활용해 전쟁에 동원했다. 하역 노동자들에게는 무기와 식량 등을 싣고 나르는 병참업무와 토목공사를 맡기고 구하기 어려운 물자는 야쿠자 덕에 쉽게 조달받았고 패전 후에도 일본은 야쿠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시 암시장에서 노점을 운영하려면 경찰과 야쿠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때 전승국민이 이 관행을 무시했고 이에 일본 경찰은 야쿠자를 끌어들여 암시장을 관리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쿄 암시장은 야쿠자와 타이완인 간 폭력 사태로 약 5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 경찰의 묵인 아래 야쿠자는 폭력으로 암시장의 질서를 유지했던 것이다. 야쿠자와 마약사업.. 더보기
일본 야쿠자 기원 , 조직문화 (가오, 이레즈비, 나와바리) 128 -1 야쿠자 기원 일본의 문제이자 골치거리 야쿠자는 도쿄에서 시작되었다. 야쿠자의 기원은 에도 막부시대로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큐수지역과 시코쿠지역을 평정한 후 대대로 살고 있던 이예야스의 근거지를 강제로 빼았아 이예야스는 낯선 에도로 옮기게 된다. 쫓겨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지역을 정비하고 발전시켰는데 그때 당시의 에도는 현재의 도쿄이다. 이후 도쿠가와는 내전으로 황폐해진 전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에도막부시대가 찾아온다. 이로 인해 하급 사무라이들은 내전이 끝나자 직업을 잃고 쓸모없는 존재들이 되자 결국 마을의 질서를 유지해 주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야쿠자의 첫 조상이다. 야쿠자 이름의 기원 일본 도박중에 산마이 카루타가 있는 패를 세장 뽑고 모두 더했을때 일의 자리가 9에 가까울수록 승리하.. 더보기
나주 삭힌 홍어의 발원지인 이유.. 나주를 대표하는 맛의 거리 영산포에서 도보로 5분 거리 선착장는 나주를 대표하는 홍어거리가 있다.  나주 삭힌 홍어 나주 영산포는 삭힌 홍어의 발원지이다. 보통 사람들은 홍어는 흑산도로 생각하지만 흑산도는 홍어가 잡히는 곳이고 나주 영산포는 옛날부터 홍어 삭히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흑산도는 생물 홍어가 유명하고 나주 영산포는 삭힌 홍어가 유명하다.  삭힌 홍어를 부드럽게 먹는 방법은 홍어삼합으로 묵은지, 수육 , 홍어를 함께 먹는다. 그러나 나주 영산포 사람들은 삭힌 홍어에 초장에 찍어서 먹는 것을 즐긴다.  삭힌 홍어 발원지가 된 배경고려 공민왕때 왜구의 침입이 많아지니 섬을 비우게 하는 공도 정책이 내려졌다. 흑산도, 영산도 주민들이 영산강을 따라 나주로 향하게 되었고 뱃길로 보름정도 걸리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