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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독일 프랑스에 콩피에뉴 협정, 베르사유 조약 복수하다. 144-2

 

[이전글] 마지노선 , 낫질작전 : 제 2차 세계대전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이유 144-1 

 

제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게 단 6일만에 점령당한 후 굴욕적인 협정 조약을 맺게 된다. 당시 프랑스 총리는 국가적 피해를 줄이려면 휴전 협정이 실리적이라고 판단했고 불과 6주 만에 나치 독일에 사실상 항복선언과 같은 휴전협정을 제한한다. 당시 총리는 필리프 페탱으로 1차 세계대전때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군 총사령관이었는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프랑스인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고 있었다. 

 

 

 

히틀러의 휴전 협정 조건 

또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이미 겪어 봤던 대다수의 프랑스인들도 이를 지지했고 받아들였다. 총리 페탱의 제안에 히틀러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과 패전국 독일이 맺은 평화조약 베르사유 조약으로 패전국 독일의 이권을 가장 많이 가져간 나라가 프랑스였다. 

 

**베르사유 조약 [1-4]

 

제1차 세계대전 미국 참전 이유-> 베르사유 조약 [1-4]

[22-4]1차 세계대전 중립국이던 미국의 참전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무제한 잠수함 작전 제1차 세계 대전의 파란을 몰고 온 독일을 잠수함 유보트는 1914년 독일의 잠수함 기술이 빠르게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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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히틀러는 프랑스와의 협정 체결을 위해 프랑스를 특별한 장소 콩피에뉴 숲으로 불러낸다. 콩피에뉴 숲은 파리에서 약 80km 떨어진 장소로 제 1차 세계대전때 독일이 항복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콩피에뉴 숲 인근에 휴전 박물관을 만들고 당시 휴전 협정을 맺었던  기차를 전시했었다. 박물관의 벽을 뚫어 기차를 꺼낸 후 22년 전 휴전 협정을 맺은 콩피에뉴 숲에 기차를 세우게 한 후 그곳에서 다시 휴전협정을 맺은 것이다. 

 

 

 

22년 전의 굴욕을 똑같이 갚아준 히틀러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 프랑스 북쪽과 서쪽의 영토는 독일군이 점령하는 것은 물론 프랑스 점령지에서 독일 제국은 점령국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영토의 3/5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점령지의 모든 시설 및 군사정비는 독일군이 양도한다는 조항과 나치 독일 점령군의 유지 비용은 프랑스가 지불한다는 조항까지 넣었다. 점령군의 유지비용은 하루에 약 4억프랑으로 하루에 884억원이었고 4년간의 점령 비용은 약 1조 1천억 프랑으로 한화로 약 243조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비시 프랑스 등장

그러나 독일도 한가지를 양보한 것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 남쪽은 프랑스 정부가 다스리도록 하는 자유지역으로 남겨 둔 것 이다.  1940년 7월 10~1944년 8월 비시라는 지역을 수도로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휴전 협정 체결 후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정부를 비시 프랑스 체제가 수립된다. 

 

 

 

프랑스를 짓밟은 히틀러의 만행 

나치 상징으로 도배 

그리고 파리의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협정 다음날 히틀러는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2시간 15분 동안 파리를 둘러 본다.  프랑스 랜드마크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 일대를 살펴보았다. 

 

 

히틀러가 오기 전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군을 막기 위해 승강기 케이블을 잘라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만 찍었다. 그러나 독일군을 시켜 1500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가서 깃발을 게양하게 만든다.

 

 

그리고 프랑스의 에펠탑은 물론, 제 1차 세계대전 승전기념비, 베르사유 궁전 앞에 나치를 상징하는 깃발을 꽃아 놓은 것이다. 

 

 

 

문화 예술품 약탈 

히틀러는 파리 입성 시 ERR (예술품 수집 특수부대)를 같이 보냈다.  예술품 수집 특수부대는 미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압류하거나 약탈했다. 히틀러는 과거 미대 지망생이었기에 예술품에 대한 욕심이 컸고 그런 히틀러에게 예술품의 천국이었던 프랑스이다. 

 

 

 

예술품 이동 금지 명령을 내리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의 유명작품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나치 독일이

들어오기 전 이미 루브르 박물관 작품들을 총 1862개의 나무 상자에 넣어 200여 대의 차량에 실어 전국 각지로 옮겨 작품을 숨기게 된다. 모나리자를 비롯한 유명 작품 3600여 점을 숨길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 소장품뿐만 아닌 성당과 미술관이 소유한 작품까지 총 2만 2천여점의 작품이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이 약탈 예술품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있는 소금광산에 숨겨놓았다. 오스트리아 소금광산 안에는 약 8000여 개의 작품이 있었다. 

 

알타우제 소금광산

 

히틀러는 예술품뿐만 아니라 바인퓌러를 프랑스로 보내 프랑스 와인과 샴페인을 독일로 가져갔다.  심지어 일주일에 40만 병을 요구하기까지했다. 

 

 

 

이렇게 가져온 와인을 약 1800m 해발 바위산 별장 부근에 저장했다. 이곳에는 무려 50만병에 달하는 양이 있었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독일에 협력하며 금주의 날을 만들기도 했다. 나치 독일에 순응하는 것이 프랑스와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 여긴 사람들 중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과 크리스챤 디올은 나치 독일군 장교의 아내들을 위해 옷을 만들었고 페탱의 흉상과 찬양용 고예품을 생산하기 위해 공장까지 지은 루이비통도 있었다. 

 

 

 

또한 프랑스 유명 자동차 브랜드 르노는 전쟁 중에 트럭, 부품 등을 나치 독일군에 납품했다. 이렇게 나치 독일에 협력한 이들을 가리켜 콜라보라고 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콜라보라는 단어는 오늘날까지도 모욕적인 말로 사용된다. 

 

 

 

프랑스인 탄압 

나치 독일은 프랑스인의 기본적인 욕구를 제재했다. 음식을 제한하고 연료마저 제한을 했다. 전쟁으로 사용해야했기에 석탄배급제를 실시했다. 적은 양의 석탄으로 추운 겨울을 견뎌야 했고 자동차에 넣을 기름조차 부족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양

 

이렇게 물자가 제한되니 사람들의 의상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무로 만든 신발 밑창을 사용하고 천이 부족해서 치마를 좁고 짧게 만들기 시작한다. 당시 나치 독일군은 낙하산, 밧줄, 그물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 안의 비단, 스타킹까지 가져갔기 때문이다. 

 

 

[다음글] 저항의 상징 : 프랑스 레지스탕스 탄생 배경 144-3 (wissue.net)

 

저항의 상징 : 프랑스 레지스탕스 탄생 배경 144-3

1939년 독일의 히틀러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5월에는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까지 침공하며  희생자만 약 7000만 명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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