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한국 전쟁 속 스미스 부대와 지게 부대 이야기 6월 27일 미군은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6월 29일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은 전용기를 타고 한강 전선에 도착한다. 그리고 1950년 7월 1일 당시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 24사단 34연대에서 선발한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고 그들이 부산항에 도착한다. 스미스 부대 전력 당시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된 체제 개혁으로 인해 일본에 있던 미군이 많이 철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군 부대 인력뿐 아니라 장비나 무기도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스미스 부대를 꾸릴때 전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스미스 부대의 전력 또한 2개 보병 중대, 4.2 인치 박격포 2대 소대, 무반동총 사수 1명, 6인치 바주카포 6개 팀 정도를 갖춘 후방의 작은 대대 정도의 전력이었다. 그래서 스미스 .. 더보기 창덕궁 낙선재 이야기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사랑채이자 경빈 김씨의 처소 석복헌(하늘에서 큰 복을 내려준다) 이 있는 곳이다. 또한 할머니 순헌왕후의 처소 수강재가 있다. 낙선재를 만든 이유 낙선재는 헌종의 헌신적인 사랑이 깃든 곳이다. 헌종 9년 효헌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에 눈을 감고 만다. 다음 해 새 중전을 뽑기 위해 삼간택을 하고 헌종은 전례없이 간택에 참여한다. 그때 헌종은 김씨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명헌왕후 홍씨를 선택하고 헌종은 어쩔수 없이 명헌왕후를 대비로 들인다. 하지만 헌종의 김씨에 대한 마을을 지울 수 없었고 3년이 흐른 뒤 헌종은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비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한 보금자리로 즐거움이 오래가라는 의미에서 즐거울 낙, 착할 .. 더보기 정조 융릉(사도세자), 원릉(영조) 조성 이유 , 배경 정조 사도세자 능을 옮긴 이유 정조는 어린 시절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버지 죽음을 모두 시켜봤다. 그리고 즉위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한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사도세자(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 융릉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도사제는 지금 서울시립대가 있는 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혀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사당 경모궁을 조성하고 14년의 계획 끝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성 인근으로 이장한다. 이유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물기가 많고 뱀이 출몰하는 흉지라고 생각해 왕이 된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닌 끝에 1789년 수원 화성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한다. 현재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융릉 앞 문인석의.. 더보기 세종대왕 묘 영릉을 이장한 이유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승하했다. 맏아들 문종은 유언에 따라 태종 세종의 부모님이 있는 헌릉 인근 수릉지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런데 그 터를 두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장남을 잃고 손이 끊어지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최양선의 말때문인지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457년 10월 21일 문종의 외아들 단종 마져 17살에 사망하게 되니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 역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이 20살에 사망한다. 예종의 맏아들 인성대군도 3살때 죽었다. 결국 세종의 영릉은 여주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날 33)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무덤) 를 예종은 왜 이장했나? 세종의 묘를 이장한 이유 문종은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예체능,병법에도 능.. 더보기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모스크바 3상 회의 해방 후 소련과 미국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구실로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소련은 김일성을 통한 간접 통치를 시작하게 되고 미국은 군정을 통해 직접 통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이 모여 당사자인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 문제를 비롯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러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협의하는 회의였다. 1945년 12월 29일 당시 남한에 들어와 있던 미군 측이 서울의 한 거리에서 신탁통치를 한다는 벽보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찍은 것이다. 신탁통치란?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 자본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팽팽한 이념 대립.. 더보기 북한산 승가사와 고려 현종 고려시대 북한산은 삼각산으로 불렸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봤을때 북한산의 세 봉우리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여 삼각산이라 불렸다. 이 삼각산에 정종, 문종, 선종, 숙종,예종, 의종등 수많은 고려의 왕이 행차했었다. 북한산 승가사는 756년 신라 경덕왕 15년에 승려 수태에 의해 창건된 절로 당나라때 큰 업적을 쌓았고 생불로 불렸던 승가대사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담긴 절이다. 이 절에 고려 현종의 흔적이 있다. 승가사 약사전에는 승가대사 불상이 있는데 불상 광배 뒷면에 글이 적혀 있다. 승가대사는 정수리 구멍에 솜으로 막아놓은 구멍이 있었다. 이것을 낮에 막아놨다가 밤에 구멍을 열면 향기가 나와서 방에 퍼져 좋은 냄새를 풍겼다고 했고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들이 그 물을.. 더보기 38선으로 나뉜 이유 : 트루먼 독트린 영향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 제 2차 세계대전 (1939~1945) 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계속된 전쟁에 세계는 대혼란에 빠지고 수세에 몰린 독일의 항복으로 1945년 5월 끝나는 듯 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으로 인해 1945년 미국은 일본에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일본은 유일한 핵무기 실전투입 사례의 전쟁국이 되었다. 이로인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38선을 나눈 이유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동시.. 더보기 부대찌개를 존슨탕이라 부른 이유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를 한때 존슨탕이라고 불렀다. 박정희 정권이 막 시작되던 때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미군부대 방문을 하게 되는데 이때 부대찌개를 먹게 된다. 존슨 대통령은 이 찌개가 너무 맛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대찌개는 당시 미군에서 남긴 소시지로 만든 음식이였고 이를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존슨 대통령을 위해 만든 특식이라고 해서 존슨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더보기 이전 1 ··· 26 27 28 29 30 31 32 ··· 6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