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땅굴은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기 위해 강원도 양구 지역에서 비밀리에 건설한 지하 터널로, 1990년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귀순자 신중철 대위의 제보와 군의 지속적인 탐사 노력, 그리고 현장에서 벌어진 우연과 용기가 만들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군견 헌트의 희생이라는 아픈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며, 제4땅굴 발견은 대한민국 군 역사에 깊은 의미를 남기고 있다.
제4땅굴 땅굴 탐사 배경
1983년, 북한 최전방 부대 참모장이었던 신중철 대위는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며 동부전선에 추가적인 땅굴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북한이 강원도 지역에서도 땅굴을 통해 남한으로 침투하려는 계획을 진행 중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군은 그의 제보를 바탕으로 1980년대 내내 동부전선에서 정밀 탐사와 시추 작업을 진행했으나, 산악 지형의 특성상 땅굴 탐지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1.2. 탐사의 어려움
동부전선은 높은 산악 지형으로 인해 탐사 장비를 설치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데 큰 제약이 있었다. 특히 시추 작업은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지질 특성상 자주 실패로 끝났다.
2. 발견 과정
2.1. 지질 탐사 및 기술적 조사
대한민국 군은 DMZ 일대에서 땅굴 탐사를 위해 시즈믹 탐지기와 청음기를 사용했다. 시즈믹 탐지기는 지하에서 발생하는 진동과 소음을 감지해 땅굴 위치를 특정하는 기술이다. 청음기를 통해 공사 장비나 인력의 움직임 소리를 탐지했다.
2.2. 시추 및 발굴 작업
198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에도 군은 강원도 양구 지역에서 땅굴 탐사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추 작업은 계속 실패로 끝났고, 병사들은 점점 지쳐갔다. 몇 시간 동안 별다른 진척이 없던 중, 한 병사가 나무 사이에 앉아 있는 꾀꼬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병사는 꾀꼬리를 지켜보다가 새가 갑자기 날아올라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병사들은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이동해 시추 작업을 이어갔다.
새롭게 시작된 시추 작업에서 물을 땅속으로 부었을 때 물이 그대로 사라지면서 지하에 빈 공간이 있음을 나타냈고, 이어 시추 기계가 땅속으로 떨어지면서 병사들은 땅굴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카메라를 투입한 결과, 철도 레일과 쇠 파이프, 그리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 발견되며 제4땅굴이 최종 확인되었다. 꾀꼬리의 방향을 따라 시작된 시추 작업은 수많은 실패 끝에 성공으로 이어졌고, 긴 탐사 과정의 전환점이 되었다. 1990년 3월 3일, 군은 의심 지역에서 시추 작업을 진행한 끝에 지하 약 145m 깊이에서 땅굴을 발견했다. 시추 봉을 삽입한 후 물을 주입했을 때, 반대편에서 흙탕물이 뿜어져 나오면서 땅굴 존재가 최종 확인되었다.
땅굴 입구가 발견된 뒤, 군은 내부 조사에 착수하며 북한의 흔적을 하나씩 확인했다. 땅굴 내부에서는 석탄 가루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북한이 땅굴 작업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뿌린 것이었다. 북한은 이전에도 발견된 땅굴들을 “석탄 채굴용 갱도”라고 주장했기에 이를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탐사 도중 사용된 청음기에서는 지하에서 발걸음 소리 같은 미약한 진동이 포착되며 병사들을 긴장하게 했다. 북한군이 땅굴에서 작업 중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으나, 정밀 조사 결과 이 소음의 상당 부분이 땅굴 내부를 돌아다니던 쥐들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3. 땅굴 내부 조사와 북한의 흔적
3.1. 카메라 투입
시추 구멍에 카메라를 투입해 내부를 관찰한 결과, 철도 레일과 쇠 파이프, 그리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 발견되었다.카메라가 땅굴 벽을 비췄을 때는 벽면에 선명한 문구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북한의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땅굴임이 명백해졌다. 땅굴 내부를 더 깊이 조사한 결과, 북한군의 치밀함이 드러났다. 내부에는 전기 조명과 환기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병력과 물자를 운송하기 위한 레일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폭발물 설치 흔적도 남아 있어, 이 땅굴이 단순한 갱도가 아니라 침투용 통로임이 명백했다.
3.2. 발견 사실 비밀 유지
북한군이 자신들의 활동이 발각된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군은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붙였다.땅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발견 현장 출입을 통제하고, 조용히 역갱도 작업(발견된 땅굴로 접근하기 위해 땅을 다시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4. 역갱도 작업과 훈련
4.1. 2달간의 역갱도 작업
- 군은 발견된 땅굴로 접근하기 위해 2달간 역갱도를 파며, 동시에 군사 훈련을 병행했다. 작업은 극한의 환경에서 진행되었으며, 병사들은 폐탄광에서 극기훈련을 포함해 총 37가지의 훈련을 수행하며 땅굴 진입 준비를 철저히 했다.
5. 군견 헌트의 희생
5.1 군견 헌트의 투입
역갱도가 완성된 뒤, 군은 땅굴에 대한 진입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땅굴 내부에서 목함지뢰로 보이는 물체가 발견되었다. 위험을 확인하고 제거하기 위해 군견 헌트가 투입되었다. 헌트는 목함지뢰를 발견했으나, 이를 밟고 폭발이 발생하며 즉사했다. 헌트의 희생 덕분에 병사들은 추가적인 인명 피해 없이 작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5.2. 군견 최초의 소위 추서
헌트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군은 헌트에게 군견 최초로 소위 계급을 추서했다. 이후 제4땅굴 입구에는 헌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헌트의 동상은 지금도 북쪽을 바라보며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6. 땅굴 무력화와 작전 완수
군은 북한 땅굴에 진입해 내부를 조사하고, 군사분계선(MDL)까지 진격했다. 이후 땅굴을 무력화하기 위해 3중 콘크리트를 발라 완전히 차단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제4땅굴을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남침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제4땅굴 발견은 귀순자의 제보, 탐사 병사들의 노력, 그리고 군견 헌트의 희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헌트의 동상은 지금도 제4땅굴 입구에서 북쪽을 응시하며 대한민국의 안보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침략 의도를 폭로하며, 대한민국의 군사적 경각심을 높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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