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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정조 융릉(사도세자), 원릉(영조) 조성 이유 , 배경

정조 사도세자 능을 옮긴 이유 

정조는 어린 시절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버지 죽음을 모두 시켜봤다. 그리고 즉위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한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사도세자(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 융릉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도사제는 지금 서울시립대가 있는 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혀있었다. 

 

융릉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사당 경모궁을 조성하고 14년의 계획 끝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성 인근으로 이장한다.  이유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물기가 많고 뱀이 출몰하는 흉지라고 생각해 왕이 된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닌 끝에 1789년 수원 화성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한다. 

 

융릉 앞 문인석 모습

 

현재 정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융릉 앞 문인석의 모습이 정조가 평생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아들 모습을 넣은 것이 아닌가, 평생 곁에서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의미가 있지 않나 추측한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긴 후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수원을 키워야 한다고 추측할 수도 있으나 수원은 서울로 물자가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도성을 방어하는 남방의 주요 거점이다. 정치, 경제, 군사적 목적으로 수원 육성을 계획을 세운 것이다. 

 

정조 영조를 원릉에 묻은 이유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는 정성왕후 옆에 묻히길 원했다. 그래서 홍릉 옆에 자신의 묘자리를 마련해 두고 떠났다.  영조는 첫 번째 부인 정성왕후와 50년간 함께 살았다. 그래서 당연히 조강지처 옆에 묻히길 원했던 것이다. 

 

홍릉 :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그러나 정조는 영조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불과 1달 만에 영조의 능을 건원문 서쪽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조성했다. 이곳은 효종의 파묘 자리로 세도세자를 죽게 만든 영조를 향한 정조의 복수였을까? 

 

원릉: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영조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정조는 위태롭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순왕후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15세에 영조에게 시집와서 17년간을 영조와 함께 살았고 당시 정순왕후 쪽에 정치적 기반이 강했다. 정조는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상황이라 당시 현실을 고려하여 영조의 능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속 사도세자의 죽음 (영화 사도의 임오화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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