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서울성곽이란 명칭이었으나 한양 도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한양도성이라 부른다. 태조가 나라를 세울때 사직- 종묘 (왕이 효를 숭상하는 의미) - 궁궐 (그 자체가 임금의 존업) - 성곽 쌓기 였다. 1396년 성곽을 쌓기 시작해 끊임없이 복원된다.
성곽이란?
성곽의 의미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 울타리의 개념으로 성벽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방어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유네스코 등재 추진이유
세계 어디를 가도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 세계 유일하게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한양 도성인 것이다.
동대문에서 시작하는 낙산 성곽 도보투어
낙산 공간은 커플들이 사진찍으로 많이 올라오는 곳이다. 낙산의 정상은 124m로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동대문 자체가 해발 20~30 m 올라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올라갈 높이는 90m 정도일 것이다.
낙산성곽 도보 투어의 시작점 (동대문)
흥인지문 동대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성곽과 함께 조성한 문이다. 태조는 문의 이름을 지을때 조선의 건국 이념인 유교 사상의 근본 사상이 되는 인의예지신(benevolence, righteousness, propriety, wisdom, and trust)을 각 방향의 문에 넣어서 문의 이름을 만들었다. 동쪽을 나타내는 덕목인 어질 인자를 넣어 흥인문이라 하였는데 후에 동쪽 지대가 굉장히 낮아 땅의 기운이 약하다 하여 산맥의 구불불한 강한 기운을 닮은 갈 지를 넣어 흥인지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동대문 역사 ( 흥인지문 ) : 왜 서울의 보물 1호인가?
서울의 심장부에 600년 넘게 서 있는 동대문.그저 오래된 성문이 아니라, 조선 왕조부터 오늘날 서울까지의 도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유물이다.1398년에 세워진 이 문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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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의 유래
낙산은 2가지 이름이 있었다. 산의 모양이 봉우리가 져서 낙타의 등과 같다 하여 낙타산이라고 불렸고 또 하나는 이 근처에 궁궐의 수라간에 임금님을 위한 타락죽을 만들기 위해 우유를 공급하던 유우소라고 하는 작은 기구가 있었다. 타락죽에 기원된 타락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중에 낙타산과 타락산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낙을 선택해 낙산이라고 줄여서 부르게 된다.
공사기간 몇년 ?
한양성곽의 총 길이는 약 18.6km이다. 태조가 성곽을 완성하는데는 98일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조선은 농업사회로 대부분의 일꾼이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들이라 농사를 안하고 쉬는 계절에만 불러서 공사를 해야했다. 그래서 1,2월 겨울 49일 동안 짓고 다음에 모내기 끝나고 추수하기 직전 8,9월 달에 49일을 지었다고 한다.
처음 성곽을 쌓을때는 산에 있는 부분만 석성으로 하고 평지는 흙으로 쌓았다. 그래서 짧게 시일이 걸렸다. 그런데 흙으로 쌓은 부분이 장마등으로 계속 반복적으로 무너지면서 결국 세종 때가 되서 흙으로 쌓여있는 부분을 전체 개보수를 해서 다 석성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은 한달정도 걸렸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20만 정도 였는데 30만이 넘는 사람들이 와서 이 작업을 했다고 한다.
성곽은 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는데 암문을 나와 성곽을 왼쪽에 놓고 오른쪽에 형성된 마을이 창신동이다. 옛날에 계곡이 있던 자리로 창신동에 거주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평화시장에서 의류를 만들어 팔았다. 창신동은 그래서 옛날부터 의류 원단을 실어날랐던 오토바이 소리와 재봉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멀리 보이는 절벽은 채석장이었다. 이곳에서 캔 돌로 덕수궁 석조전, 조선총독부, 서울시청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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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공원
낙산공원은 옛날에 달동네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라 주변 경관도 좋지 않고 아주 낙후된 곳이었다. 그곳을 1999년 부터 3년간의 공사를 통해 낙산 공원으로 조성을 했다.
팔각정
이곳 팔각정은 경치가 좋아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과 문객들이 모여 시를 읽고 놀이를 하던 공간이다.
낙산 정상 124.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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