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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Here

송파구 지명 유래 - 방이동과 오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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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의 방이동 오금동은 병자호란 당시의 아픈 기억이 지명 속에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두 지명의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1. 방이동(芳荑洞)의 유래

송파구 동쪽에 자리한 방이동은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유래는 병자호란 당시의 이야기다.

  • '오랑캐를 막아낸 곳'이라는 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인조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길이 급박했다. 이때 청나라 군대가 한강을 넘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는 길목이었던 지금의 방이동 일대에서 조선의 관군과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청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이들의 저항 덕분에 인조는 피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처럼 오랑캐를 막아낸 곳이라는 의미에서 처음에는 **'막을 방(防)', '오랑캐 이(夷)'**자를 써서 방이골(防夷谷) 또는 **방이리(防夷里)**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지명은 당시 백성들의 항전 의지와 희생을 담고 있는 셈이다.

 

 

  • 지명의 변화: 하지만 '오랑캐 이(夷)'자가 들어간 지명이 다소 부정적이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나중에 **'꽃다울 방(芳)'**과 **'흰 비(荑)'**자를 사용하는 지금의 **방이동(芳荑洞)**으로 바뀌었다. 이는 마을에 꽃이 많이 피어 아늑하고 아름답다는 의미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즉, 아픈 역사의 흔적을 아름다운 자연의 이미지로 덮으려 했던 선조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 인조 관련 일화: 또한 방이동에는 인조와 관련된 또 다른 일화가 전해진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던 인조가 잠시 쉬어갔던 자리에 대왕좌(大王座)나무라고 불리는 큰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구획정리 이후 사라졌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왕의 피난길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2. 오금동(梧琴洞)의 유래

송파구 남쪽에 위치한 오금동 역시 인조의 피난길과 연결된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 '오금이 아프다'는 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던 중, 지금의 오금동 일대에 있는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긴박하고 힘든 피난길에 지쳤던 인조가 신하에게 자신의 무릎 뒤쪽, 즉 '오금(吾襟)'이 아프다고 한탄한 데서 이 지역이 **'오금골'**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후에 오금동이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유래는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야사이지만,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되며 왕의 인간적인 고통과 피난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 '오동나무와 거문고' 설: 오금동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설도 있다. 옛날 이곳에 **오동나무(梧桐)**가 많고, 이 오동나무로 **거문고(琴)**를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오동나무 오(梧)'**와 **'거문고 금(琴)'**자를 합쳐 **오금동(梧琴洞)**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 설은 오금동 지역의 전통적인 특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송파구의 방이동과 오금동 지명에는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와 함께, 당시 백성들의 희생과 왕의 고단했던 피난길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명의 유래를 알고 나니,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곳들이 달리 보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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