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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캐럴 (= 케롤: Carol) 역사 131-3 캐럴의 어원은 옛 프랑스어로 둥글게 춤춘다는 의미인 Carole 그리스 헬라어로 피리 연주에 추는 춤이라는 Choraulien 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캐럴의 시작은 축제에서 춤추기 위한 음악이었다. 캐럴이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유행하게 된 계기는 1223년에 아시시의 성 프랑치스코가 예수가 태어난 것을 기리기 위해 마구간 앞에서 춤추면서 노래한 것이 민간에서 캐럴로 불리며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행사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형태로 바뀐 시점은 불명확하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의 음악을 불신했다. 오르간을 포함해 가톨릭 음악을 악마의 음악으로 비판하기까지했었다. 그러나 마틴루터가 캐럴에 대한 음악의 인식을 바꾼다. 이후 개신교에서 캐럴로 다양한 찬송가를.. 더보기
산타 클로스는 존재할까? 131-2 산타 클로스 기원 지금의 산타 모습과는 다르지만 산타는 존재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3~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하며 성인으로 시성된 튀르키예 기독교 성직자 성 니콜라(270~343) 가 산타의 원조로 불리고 있다. 평소 선행을 베풀었던 성 니콜라오스는 아주 가난했던 세딸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너무 가난한 집안이라 딸들을 팔아야 하나를 고민할지까지 생각할 만큼 가난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성 니콜라오스는 이 가족을 도와주기 위해 밤에 가복의 집을 방문해 창문 너머로 몰래 황금 세 덩이를 던저주고 갔다. 그런데 그가 던진 황금 세 걔가 떨어진 위치가 창문 너무 걸려 있던 양말 속으로 금덩이가 들어갔고 여기에서 크리스마스에는 양말에 선물을 넣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서기 343.. 더보기
세계 최초 크리스마스 씰 / 성탄절이 공휴일로 언제부터 지정되었나? 세계 최초 크리스마스 씰 크리스마스 씰은 우표의 기능은 하지 않지만 해마다 독특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19세기 산업혁명 시기 전염병이 난무하던 때 결핵 환자가 많았는데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우체국 직원이 우편물에 동전 한 닢짜리 씰을 붙여 보내면 환자를 도울 수 있는 기금을 마련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아이디어를 내서 덴마크 국왕에게 전달했고 1904년 12월 10일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 크리스마스 씰 (Christmas seal) 일제강점기 속 최초 크리스마스 씰 (Christmas seal) -셔우드 홀 / 엘리자베스 키스 우리나라 최초 크리스마스 씰 우리나라의 최초의 크리마스 씰을 만든 사람은.. 더보기
크리스마스 역사, 뜻 : 성탄절은 예수 탄생일이 아니다!! 130 -1 예수의 탄생, 박해 , 죽음 그리고 기독교의 시작 69-2 (이전글 보기 69-1) 기독교 탄생의 역사적 배경 예수를 마굿간에서 낳은 이유 예루살렘에서 10km 떨어진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는 예수의 부모로 알려진 나사렛에 살던 가난한 목수 요셉과 그의 아 jangane.tistory.com 세계의 크리스마스 핀리핀에 가면 로바니에미 산타마을이 있다. 산타 마을로 편지를 보내면 산타가 직접 답장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1년에 약 50만 통의 편지가 오고 있다. 산타를 보조하는 엘프들이 있는데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때문에 7개 국어가 가능하다고 한다. 에스토니아 탈린은 중세도시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최초의 트리가 이곳에 있다는 설이 있다. 스페인은 가장 열광적으로 크리스마스를 .. 더보기
성탄절 구세군 냄비 (The Salvation Army) 역사 , 의미 130-3 크리스마스 나눔의 문화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원래 초창기 미국은 청교도인들이 건너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미지가 약했고 대중적이지 않아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문화가 거의 없었다. 구세군 탄생 배경 사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런던의 목사 부부가 빈민가에서 자선 활동을 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러다가 1891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배가 좌초가 되어 1000여명의 이재민과 도시 빈민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을 돕기 위해 돈을 모으게 되었다. 이재민과 도시 빈민을 돕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고민하던 사람이 냄비를 이용해 성공적으로 기부를 했던 것이 문화가 되었다. 구세군 의미 구세군 (The Salvation Army) 은 각 지역마다 사.. 더보기
박싱데이, 블랙프라이데이 기원 130-2 박싱데이란? 박싱데이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을 뜻하는 말로 많은 영연방 국가에서 크리스마스와 함께 휴일로 정하여 성탄 연휴로 즐기고 있는 날이다. 박싱데이는 산업혁명의 의미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건전한 의미였으나 상업주의를 만나면서 원래의 나눔의 의미가 변화되어 쇼핑하는 날로 바뀌었다. 추수감사절 이후부터 크리스마스때, 크리스마스 다음날까지 계속되는 연말 쇼핑의 절정인 기간을 박싱데이라고 한다. 박싱데이 기원 크리스마스에 나눔의 의미를 더한 사람이 있다. 19세기 나눔의 분위기를 만든 결정적 인물은 빅토리아 여왕이다. 64년간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빅토리아 여왕은 크리스마스 만찬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때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을 나눠줬고 .. 더보기
칠면조(Turkey)는 어떻게 크리스마스 대표 음식이 되었나? 영국 유럽은 크리스마스에 칠면조 고기를 먹는다. 칠면조가 크리스마스 대표음식이 된 것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지만 과거 오스만 튀르크를 통해 칠면조와 비슷하게 생긴 새가 유럽에 소개됐다고 추측된다. 이것이 다시 영국 상인들을 통해 영국으로 건너왔는데 상인들이 터키에서 온 음식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했다. 그런데 17세기 대항해시대 때 영국인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뿔닭과 비슷한 진짜 칠면조를 보고 똑같이 터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썰이 있다. 당시 야생 칠면조 (Turkey)가 많았고 이것을 잡아서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에 칠면조를 먹기 시작했다. 칠면조 평균 무게만 7~11kg 이다. 닭고기의 7배 정도 크기로 엄청난 크기이다. 매년 미국은 크리스마스에만 칠면조가 2천만 마리가 소비된다. 추수감.. 더보기
야쿠자와 마약사업 정치권 연결 배경 (필로폰 = 히로뽕 ) 128-2 (이전글) 야쿠자 기원 야쿠자가 성장한 계기는 1941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때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도시 안에서 권력을 가진 야쿠자를 적극 활용해 전쟁에 동원했다. 하역 노동자들에게는 무기와 식량 등을 싣고 나르는 병참업무와 토목공사를 맡기고 구하기 어려운 물자는 야쿠자 덕에 쉽게 조달받았고 패전 후에도 일본은 야쿠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시 암시장에서 노점을 운영하려면 경찰과 야쿠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때 전승국민이 이 관행을 무시했고 이에 일본 경찰은 야쿠자를 끌어들여 암시장을 관리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쿄 암시장은 야쿠자와 타이완인 간 폭력 사태로 약 5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 경찰의 묵인 아래 야쿠자는 폭력으로 암시장의 질서를 유지했던 것이다. 야쿠자와 마약사업.. 더보기
일본 야쿠자 기원 , 조직문화 (가오, 이레즈비, 나와바리) 128 -1 야쿠자 기원 일본의 문제이자 골치거리 야쿠자는 도쿄에서 시작되었다. 야쿠자의 기원은 에도 막부시대로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큐수지역과 시코쿠지역을 평정한 후 대대로 살고 있던 이예야스의 근거지를 강제로 빼았아 이예야스는 낯선 에도로 옮기게 된다. 쫓겨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지역을 정비하고 발전시켰는데 그때 당시의 에도는 현재의 도쿄이다. 이후 도쿠가와는 내전으로 황폐해진 전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에도막부시대가 찾아온다. 이로 인해 하급 사무라이들은 내전이 끝나자 직업을 잃고 쓸모없는 존재들이 되자 결국 마을의 질서를 유지해 주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야쿠자의 첫 조상이다. 야쿠자 이름의 기원 일본 도박중에 산마이 카루타가 있는 패를 세장 뽑고 모두 더했을때 일의 자리가 9에 가까울수록 승리하.. 더보기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126-1 영국이 전 세계를 호령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기틀을 마련한 인물인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자 처녀여왕이라 불렸던 엘리자베스 1세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왕이라고 불린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출생부터 왕위 계승에 데한 정통성 , 권력, 미모까지 한평생 모든것을 비교당하며 엘리자베스 1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인물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이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한때는 프랑스의 왕비로 지내며 유럽 권력의 최정점에 올랐던 여왕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소유했던 인물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때문에 남성들을 홀리며 세번이나 결혼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메리는 우리나라 엄친딸처럼 어릴때 부터 시, 음악, 스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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