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신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 경상북도 경주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곳곳에 신라 1000년의 역사와 보물이 숨어 있다.
김유신 이야기
경주 송화산 초입 화려한 무덤 하나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 장군이다.
1970년 남북이 분단되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대통령 박정희는 북쪽을 바라보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경주 황성공원에 세웠다. 김유신은 그 예전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되었고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가 열전으로 3권이 있다.
그러나 김유신은 경주 사람(경주 김씨)이 아니다. 신라가 멸망시킨 가야의 후손 김해 김씨이다. 또한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진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유신은 부모님이 거처를 경주로 옮기게 된다.
서기 645년 김유신은 백제와 전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다시 백제가 공격하니 출전하라는 왕명이 떨어졌고 그때 김유신은 자신의 집에 거의 다 와서 다시 돌아갔다. 대신 50보 바깥에서 부하들에게 재매정에서 물을 떠오라고 시킨다. 우리집 물맛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며 다시 전쟁터로 출정한다.
김유신의 집터 재매정 터에서 1km 떨어진 곳에 경주 천관사지는 사적 제 340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인데 김유신이 어릴 적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방탕한 생활을 한적이 있다 . 그때 김유신은 기생 천관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김유신을 꾸짖고 이에 김유신은 정신을 차리지만 어느 날 술에 취한 김유신, 그의 말이 그를 데리고 천관녀의 집으로 향한 것이다. 술에서 깬 후 김유신은 자신의 애마의 목 단칼에 베어버렸다. 이후 김유신은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고 자신의 낭도들을 이끌고 열심히 무예를 연마한다.
629년 낭비성 전투를 시작으로 김유신은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신라 최고 관직은 각관과 대각관에 이어 태대각관에 오르게 되고 사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된다.
김유신이 신라의 권력층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치적 파트너로 신라의 몰락한 또 다른 왕족이나 총망받던 젊은이였던 김춘추였다. 이런 김유신은 몰락한 귀족 출신 김춘추와 손을 잡는다.
신라 삼국통일 계획에 없었다 ?!
대야성 전투에서 자신의 딸을 잃은 김춘추는 복수를 위해 고구려 보장왕을 만나 원군을 요청하기로 한다. 그러나 보장왕은 그 대가로 한강 상류 신라의 죽령 서북 땅을 요구한 것이다. 이 제안을 거절하니 고구려왕은 그를 가둔다.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3천 별동대를 고구려 국경에 집결시킨다. 이에 놀란 보장왕근 김춘추를 풀어준다. 이후 김춘추는 일본으로 향했고 일본 또한 김춘추의 청을 거부했고 그래서 그는 당나라로 향한다.
648년 나당연합
김춘추가 왜와의 동맹을 위해 찾아갔을 때 왜는 대동강 남쪽 땅만 신라에게 주고 북쪽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차지하겠다고 했으나 김춘추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삼국통일은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당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비담의 난 이후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선덕여왕의 사촌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한다. 이때도 김춘추와 김유신의 새 여왕을 보필하며 권력을 다지지만 그녀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재위 7년만에 후사없이 세상을 떠난다. 후계자를 논의하는 귀족회의에서 김유신이 김춘추를 추대해 왕좌에 올린다. 이에 김춘추 김유신의 추대로 신라의 29대 최초의 진골출신 태종 무열왕이 탄생한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 김유신도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웅진성으로 대피했던 의자왕은 항복을 선언한다. 백제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때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죽인 배신자 검일을 찾아내 그의 사지를 찢어서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김춘추의 복수극은 끝이 났다. 한 사람의 지독한 복수심에 한 나라가 사라진 것이다.
661년
그러나 김춘추의 복수극에는 대가가 따랐다. 당나라와 했던 이면 계약이 있었다. 옛 백제 땅은 신라에 주고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 멸망에도 철수하지 안고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한다. 그러던 와중 661년 복수극의 주인공 태종 무열왕이 사망한다.
백제 멸망 8년 후 고구려도 사라진다. 김유신도 673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60년 뒤 김유신은 왕이 된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나라는 끊임 없이 신라땅을 침략한다. 그러나 매초성,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치면서 서기 735년 당나라는 마침내 물러난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른다.
김유신 동상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
삼국통일의 주역을 우리는 김유신, 김춘추 문무왕이라고 꼽는다. 그러나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보면 김춘추가 대야성 전투 이후 백제에 대한 복수심으로 한 평생을 보냈다. 여러 비석에 보면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위해 힘썻다는 내용이 너무도 많다. 그 이유는 1970년 박정희의 남북통일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는 삼국통일, 우리는 남북통일이라는 과제로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부각하면서 김유신 동상도 세우고 했던 것이다.
원래 김유신 동상도 경주 남쪽 신라 궁궐인 월성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동상의 방향도 북쪽으로 틀었다. 김유신이 마지막으로 무찌른 고구려가 북쪽에 있다는 이유였다. 그들에게 삼국통일이라는 의도 보다는 가문의 영광과 복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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