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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한명회 계유정난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다. 17회 한명회은 어떻게 조선의 왕을 바꿨나? 한명회 관직오르다. 한명회는 과거시험에 한번도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 지략과 처세술만큼은 뛰어났다. 과거시험에 한번도 합격하지 못한 한명회는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오른다. 음서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의 자식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이렇게 음서를 통해 38살의 나이로 관직에 오르게 된다. 처음 한명회가 오른관직은 경덕궁 궁지기였다. 종9품 말단 관리직으로 시작한다. 수양대군과의 만남 말단 관리직으로 있던 한명회에게 당시 왕의 삼촌 수양대군이 찾아온다.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위기에 처해있었다. 단종 주변 인사들의 수양대군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고 시.. 더보기
중국 자금성에 소현세자가 살았다. [15회] 자금성 황제 외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뜻의 600년 넘는 역사를 품은 황궁, 어마어마한 규모로도 유명한 곳, 건물 수만 900채가 넘는 축구장 약 72배 세계 최대 궁궐인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 궁궐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과거 중국 황실의 상징으로 우리나라의 경복궁과 비슷한 곳이다.  자금성에 조선의 세자가 살았다. 그는 바로 소현세자이다. [1612~1645]  조선 16대 왕, 인조의 장남으로 차기 왕좌에 올라야 했던 소현세자는 왜 자금성에서 살아야했을까?    삼전도의 굴욕 1637년 1월 30일 한겨울 칼바람이 불던 날이다. 모래벌판에 황금색 천막의 단 아래 서 있는 조선의 왕 인조였다. 모래바닥에 무릎을 꿇고 "천은이 망극합니다" 라고 양손을 땅에 대고.. 더보기
광통교 신덕왕후 강씨 무덤돌이 왜 나와? (14회) 광통교 무덤돌 서울 중심에 위치한 청계천의 22개 다리 중 하나인 광통교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청계천 광통교 다릿돌의 정체는 조선 왕가 무덤에 병풍석이다. 그렇다면 무덤의 돌이 왜 여기 있을까? 이 무덤의 주인은 조선의 3번째 왕, 태종 이방원의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 무덤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누구? 이방원은 세종의 아버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드라마, 영화에서 워낙 많이 나왔던 인물로 이방원은 8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방원의 두 번째 어머니 강씨에게는 두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있었다. 고려말은 첩과 처의 구분이 없었고 정략결혼을 통해 이성계의 2번째 부인이 된 강씨였다. 강씨는 비록 친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이성계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더보기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와 고려 몽골 침략 과정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1233~1248년으로 이 시기 몽골은 중국, 러시아, 유럽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였다. 이때 몽골의 지배자가 칭기즈칸(재위1206~1227)이었고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몽골 제국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 몽골 침입때문이었다. 이때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합천 해인사 국보 팔만대장경은 경판의 수가 81258매에 달하여 팔만대장경이라 불린다. 1233~1248년 완성되는데 약 16년 걸렸다.  경판(약 3250m)을 하나씩 쌓아 올리면 백두산(약 2700m) 보다 높다.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 중인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의문의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1225.. 더보기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나? (12회) 1762년 초여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뒤주가 들어온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뒤주로 들어가라고 명하고 사도세자는 8일 후 뒤주 안에서 주검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500여년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사도의 탄생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 인생에 큰 기쁨이었다. 그 이유는 영조가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42세였고 조선왕의 평균 수명이 47세 인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나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세자가 귀한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25 살에 효장세자를 얻었으나 효장세자 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첫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첫 아들을 잃고 7년 만에 기다리던 아들 사도가 태어났던 것이다. 영조는 아들이 .. 더보기
조선시대 환관 이야기, 박한종 (청도 운림고택) 조선 시대 환관 조선시대 환관은 왕의 측근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직책이었으나 환관이 되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민에서 양반까지 환관을 꿈꿨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환관으로는 박한종, 임우등이 있다. 환관의 뜻 벼슬 환, 벼슬 관 으로 벼슬하는 관리라는 뜻 외에도 남성성을 상실했다는 뜻이 있다. 조선환관에는 내시라는 이름도 있었다. 고려시대 환관과 내시는 다른 신분이었으나 조선 시대는 내시=환관이 같은 말이 되었다. 환관은 궁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궁녀들이 하기 힘든 일을 하기도 하고 왕실 사람들은 시중을 들거나 때론 왕과 신하 사이에서 나랏일을 돕기도 했다. 환관이 필요했던 이유는? 왕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궁궐에는 많은 후궁들이 있었고 후궁 이외에도 왕의 여.. 더보기
임진왜란 때 끌려간 이삼평 일본 도자기 신 되다. (이도다완 일본 국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조선인 사기장이 많이 끌려갔고 그중에 이삼평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도자기의 조상이 된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까지 통틀어서 임진왜란이라고 칭한다. 1592년 4월 3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왕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갔고 90여 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17일 만에 지방의 성을 함락시키고 한양 앞까지 쳐들어 왔던 것이다. 선조는 평양성에서 조선의 국경인 의주까지 쫓겨갔고 결국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은 무려 7년 동안 이어졌다. 임진왜란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일본은 경남 해안까지 밀려났고 그곳에서 성을 짓고 버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전쟁을 끝내고 떠나.. 더보기
의자왕은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나? (9)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의자왕은 삼천궁녀, 안시성 기벌포, 황산벌 전투 등 영화의 소재가 되었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방탕하고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 그는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는지 알아본다. 의자왕은 누구? 의자왕 뜻은 옳을 의 , 사랑 자, 로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라는 뜻이다. 7세기 중반 삼국시대 모습으로 백제가 특히 경계하던 나라는 신라였다. 의자왕은 왕으로 즉위하고 이듬해 632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고 의자왕이 지휘한 첫 전투에서 40여 개의 신라성을 함락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재위하자마자 신라를 벌벌 떨게 했던 의자왕이었다. 왜 백제는 신라만을 열심히 공격했던 것일까? 지리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백제 의자왕 가문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무려 4대조부터 이.. 더보기
세종 ! 며느리 4번 이혼 시키다. 이유는? (8회) 세종의 적장자 왕 문종을 두번이나 이혼시키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이혼시켰는데 조선 시대 최고의 성군 세종도 가족일 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종의 적장자 문종 조선은 건국 이후 적장자에 의한 왕위 세습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1~4대 세종까지 아무도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세종의 아들 문종의 결혼은 조선의 적장자 왕위 계승의 첫번째 사례였기 때문에 세종에게 특별했다. 유교 종법상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의 기회로 정말 상징적이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사망한 문종이었다. 1. 세종의 첫 번째 며느리 퇴출 문종은 문무를 두루 겸비한 왕으로 즉위 전에 세종 곁에서 정치 경험을 쌓고 있었다. 세종은 무려 3년이나 며느리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심사숙고 끝에 세자빈을 고른 .. 더보기
고종의 아관파천 이유, 민영환 조선사절단, 충정로 유래 (7회)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 새벽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두 대의 가마로 경복궁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던 것이다. 현재 러시아 공사관은 전쟁으로 파괴된 후 첨탑만 남아 있는 곳이다. 고종은 경복궁 탈출 시 일본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여자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갔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고 러시아 공사관을 '아관' 이라고 해서 아관 파천(왕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산하는 일) 이다. 고종과 왕세자가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1년 넘게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간 사건이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유 아관파천은 1896년의 일이다. 아관파천 2년 전인 1894년-1895년 조선에서 청일 전쟁이 일어.. 더보기